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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설악산, 산에 대한 예의
산을 사랑하는 사람처럼 아껴주세요
by
우산
Oct 1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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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철이 되니, 몇 년 전 설악산 병풍바위를 보러 갔던 일이 생각난다.
몇십 년 만에 개방하는 등산로라고 해서 친구들과 이른 아침 산행을 떠났다.
안양에서 6시에 출발했지만 한창 출근 시간 때의 도로만큼 단풍철 등산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색약수에서 출발한 등산로는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나무 한 그루를 멀리서 촬영하고 설악산의 기암절벽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도 어려웠다.
사람들이 모두 집을 버리고 산으로 이사 왔나 싶을 정도로 산의 구름다리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잠시 멈춰서 사진을 찍으려 하면 금세 사람들이 다닥다닥 모여들었다.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180cm가 한참 넘는 친구가 팔을 위로 뻗어 촬영을 했다.
사람 뒤에 사람, 사람 앞에 또 사람, 그 분주함을 지나 목표지점인 설악산 병풍바위에 앞에 도착하니, 입이 딱 벌어졌다. 새벽길을 나서 몇 시간 버스를 달리고 산에 있는 사람 숲을 지나 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정말 내가 보는 게 이 세상일까 싶을 정도로 멋진 바위와 소나무가 있는 자연의 병풍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름다움보다는 경건함에 가까웠다.
하늘이 숨겨둔 비경, 몸과 마음이 간절히 원해서 정성스럽게 한발 한발 내디뎌야 올 수 있는 곳이다.
올라가면 내려가야 한다. 나는 항상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가는데 속도가 느리다. 경사진 길, 돌부리가 있는 길을 내려가다 삐끗할까 걱정이 되어 발을 빠르게 내딛지 못한다.
올라갔던 사람들이 내려가는 시간도 비슷하니 내려가는 길도 복잡하다.
자동차 정체가 심할 때 딸이 차가 계속 가는데 왜 밀려요? 하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산은 사람들이 많아 밀리기는 해도 완전한 정체는 없다. 특별하게
험한 길 아니고, 평범한 오솔길은 그저 한 발 한 발 내딛으면 느리게 줄은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내려가다 보니 한 지점에서
길니 막혀 멈춰 섰다.
왜 그렇지? 다른 데서 끼어들 곳도 없는데.
정체구간을 지나서 보니 좁은 등산로 한쪽 옆에 술에 취한 사람을 그의 지인들이 붙잡고 있다.
뭐라고 중얼거리고.
이런, 이런 곳에 와서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시고 민폐를 끼치다니...
문득 산에 대한 예의라는 말이 생각났다.
산은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우리를 받아준다.
나이가 많건 적건, 여자건 남자건, 키가 큰 사람이건 작은 사람이건...
값없이 초록색 명화를 보여주고 하늘 아래 묵묵히 우리를 감싸주며 등산지팡이로 콕콕 찍어도 참아준다.
단단한 바위는 우리를 위협하고 거부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람과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든든히 지켜주고 변함없는 신뢰를 가르쳐 준다.
경사가 급한 등산로에 있는 나무는 수많은 등산객들이 안전하게 붙잡고 돌아가도록 제 등줄기를 내어 주어 손자국이 나서 반들반들하게 닳아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킨다.
세상의 매연과 소음과 경쟁 속에서 지친 우리가 내뿜는 호흡을 받아주고 가슴 깊이 피톤치드로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그런 산 앞에서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하는 산 앞에서 취객이 되어 등산로를 막거나 자신과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산의 위로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산불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산의 위로를 한순간에 날려버리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산과 나무를 훼손시키는 일이다.
겨울 가뭄으로 마른나무에 불이 붙어서 산을 태웠던 고성 산불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너무 넓은 지역이라 어쩔 수 없겠지만 내 마음 같아서는 산에도 일정 구역 방화벽을 두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든다.
고성 산불이 나고 그 얼마 뒤 근처 휴게소를 지나다가 그 산불의 흔적을 본 적이 있다. 자연재해야 어쩔 수 없더라고 적어도 등산객의 실수로 이런 화재가 나지는 않게 하는 것이 산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값없이 주는 나무와 산의 사랑은 산에 대한 예의를 지킬 때 오래도록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코로나가 발생하고 등산을 하다가 가끔 마스크가 나무 사이에 떨어진 것을 볼 때가 있다. 바람에 날려 붙잡을 수가 없었다면 몰라도 썩지
않는
마스크 쓰레기를 떨어뜨렸다면 주워서 가져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여름 관악산 정상 근처에서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가만히 있어도 더운 여름날, 쓰레기를 줍는 봉사가 평지에서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무더운 여름날 산 위에서 하는 사람들을 보니 고맙고 나도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행들과 조금 도왔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서로 예의를 지켜야 유지되고 돈독해지는 것처럼, 말없는 산이라고 해서 무질서로 대하면 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이 유지될 수 없다.
그 산이 있어 거기 오르지만, 올라서 보면 무한한 행복감을 느낄 때가 많다. 인내심이 있는 산이고, 마음이 너그러운 산이지만 우리가 아끼고 산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산도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
이제 물들기 시작한 가을 산의 풍경화를 보러 가서 산을 무시하고 무질서로 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가을 산에 오르면 나도 가을 풍경화의 일부가 된다. 자연의 아름다운 색으로 우리의 마음도 행복하게 물들
고 서로 공감하며 오래도록 아름답게 만나는 사이가 되
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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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설악산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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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결혼, 플러스 마이너스.
09
짧은 이별, 긴 만남
10
설악산, 산에 대한 예의
11
맥스 달튼 '영화의 순간들'
12
사진 전시, 박용기 님 '시가 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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