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할 때마다 미래를 그렸다. 그 미래들은 모두 다 결혼으로 끝이 맺어졌다. 그래서였던 건지 그 관계들은 다 길게 가지 못했다. 외모, 성격, 습관, 취미, 가치관, 비전, 직업, 집안의 가풍, 가족과의 관계 등을 결혼과 연관 지어 생각했다. 이것들은 결혼이 가능한지의 판단 조건이 되었다.
아이를 낳으면 키는 이 사람을 닮으면 좋겠다던가, 취미가 다른데 함께하려면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라던가, 나와 다른 집안 분위기에 내가 적응할 수 있을까 라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했다. 유독 다투는 날이면 사고회로가 부정적으로 기울어져 ‘이렇게 성격이 다른데 평생 살 수 있을까’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헤어진 이유는 모두 달랐지만 대부분 종착지인 결혼까지 가지 못할 거 같아서였다.
유학시절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이랑은 진짜 결혼은 못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헤어졌다.
어렸던 나는 다름을 잘 인정하지 못했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법도 존중하는 법도 성숙하게 대화하는 법도 잘 몰랐다. 그래서 5년 동안 두 번의 헤어짐이 있었다. 세 번째 다시 사귈 때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성격차이를 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계속 노력하며 관계를 이어나갔다. 유학 생활을 끝내고 나는 한국으로 들어왔고 그는 같이 한국에 들어왔지만 군대에 갔다.
어느 날 그가 휴가를 나왔다. 익숙한 대화의 흐름대로 우린 언쟁을 벌였고 아마 내가 먼저 공격을 했을 거다. 그는 나한테 배운 대로 되받아쳤다. “너도 좋은 엄마는 못 될 거 같아. 감정기복이 심해서 아기 낳으면 산후우울증 때문에 그냥 버리고 친정으로 도망갈 거 같아. 나는 그런 걱정을 하기도 해”. 나를 이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아주 충격적이었다. 한편으론 이 사람도 이 사람 나름대로 우리의 미래를 그린다는 게 위안이 됐다. 그렇게 안심을 하는 내가 웃겼다.
그 대화 이후로 우리의 관계엔 확실한 금이 생겼다. 곧이어 나는 그를 한국에 남겨두고 호주로 떠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각자의 나날들을 보냈고 서로 의미 없는 일상을 공유했다. 하지만 그건 연명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 때문이든 성격차이 때문이든 결혼이 없는 우리에겐 미래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사귈 이유가 없어 상호 동의하에 상처 없는 이별을 맞이했다. 처음으로 평온한 대화를 나눴다. 첫 만남, 첫 여행, 사귀면서 좋았던 점, 싫었던 점, 함께했던 추억들을 곱씹으며 ‘좋았었다고’ 말했다. 그 통화는 두 시간 넘게 지속됐다. 각자의 미래를 응원하며 결국 서로를 놓아주었다. 그 이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었다.
20대 초중반의 나는 사회가 지속해 온 결혼이라는 전통적인 관념과 틀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었고 그게 정답인 줄 알았다. 관계가 더 좋아질 수 있게 지금을 사랑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편협한 시야에 갇혀 그 인연을 흘려보냈다. 나는 결혼이란 우물 안 개구리이자 철창에 갇힌 새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