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더 이상 쓰지 않아서 사라지는 단어가 있는가 하면 언제부턴가 나와 동떨어지면서 잊혀지는 단어가 있다. 나에게 잊혀진 단어는 '아사'였다.
엊그제, 스코틀랜드 친구한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나한테 관심 있을 다큐가 BBC에 있으니 한번 찾아보라는 것이다. 친구가 보내준 인터넷 주소를 클릭하자 빨간 별이 그려진 익숙한 깃발이 먼저 화면에 나타났다. 그리고 '아사'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자막 없이도 내 귀로 쏙쏙 들어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반가우면서도 한쪽 가슴이 시려오는 게 휴지를 옆에 끼고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것을 닦기에 바빴다. 다큐에서는 북한 주민 세 명과의 비밀스러운 인터뷰를 담고 있었다.
평양에 살고 있는 지연,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그렇게 잠이 들었고 저는 죽은 줄 알았어요. 적어도 우리 아이들만은 살아야 할 텐데 말이죠."
물을 배급받는 날, 물 좀 가져가라고 지인의 집에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당국이 사람을 보내 강제로 그 집 문을 열었다. 일가족 세명 모두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중국 접경 근처에 사는 한 건설 노동자 찬호,
"우리 가족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꼼짝없이 갇혀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가 사는 마을에 아이들 둘과 혼자 사는 엄마가 있었다. 엄마가 아파서 일을 나가지 못하자 남겨진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목숨을 연명해야 했다. 며칠이 지나서 세 명 모두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당국은 그들이 병 때문에 죽은 거라고 단정 지었다. 우리가 사는 마을에서만 이미 5명이 굶어 죽었다. 코로나로 의심이 되는 사람은 10일 동안 꼬박 집에만 있어야 했다. 절대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한 엄마는 그 룰을 어기는 바람에 어린 아들과 함께 노동교화소로 보내졌고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아사로 죽었다. 다섯 명이 살고 있던 한 가정은 가중한 격리 후 거의 시체가 되어 바깥세상으로 나왔다고 한다.
북한의 한 시장 상인 명숙,
“처음엔 코로나19 감염으로 죽을까 두려웠지만 이제는 굶어 죽을까 걱정이 돼요.”
북한은 3년 넘게 국경을 봉쇄하고 있다. 사람뿐 아니라 물건도 들어오지 못한다. 보통 시장에 있는 제품의 4분의 3이 중국에서 들어 오지만 지금은 시장이 텅 비어있다. 밥에 옥수수가루를 섞여 가며 겨우 한 끼니를 채우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밥 좀 달라는 아이들이었다.
https://www.bbc.co.uk/news/world-asia-65881803
북한 주민들의 독점 비밀 인터뷰 BBC 다큐.
작년 크리스마스 때 만나기로 하고선 그때부터 새미는 깊은 겨울잠에 들어갔다. 앞다리와 뒷다리를 가진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어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번데기 안에서 몸을 웅크렸던 나비들도 훨훨 날아 예쁜 꽃들을 찾으러 다니건만 새미는 여태 연락이 없다. 전화도 받지 않고 집에 찾아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며칠 전, 잘 지내냐는 내 메시지에 웬일로 답장이 왔다.
"화장실에서 넘어졌어. 갈비뼈에 금이 가고 오른쪽 팔이 붓고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나 아직도 살아있어.'라는 메시지 같아서 무지 반가웠다. 새미의 주변엔 가족이 없다. 그렇게 긴긴 잠을 자도록 누구 하나 문을 부숴가며 '그만 자고 일어나!' 흔들어 깨울 사람도 없다. 나도 이런저런 핑계로 그를 찾아가지 못 한지 벌써 반년이나 흘렀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국가에서 보내는 간병인이 필요한 음식과 약을 건네 줄 뿐이었다. 오늘은 무조건 새미를 보기로 결심했다. 저녁에 만든 마카로니 치즈와 새미가 좋아하는 바나나, 크림치즈를 들고 새미의 집으로 갔다. 10분. 20분. 30분을 기다려도 새미는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뒷마당의 잔디는 내 얼굴만큼 올라왔고 사람이 앉아야 할 벤치에는 주인에게 버려진 듯 용도도 모를 플라스틱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음식만 문 앞에 두고 집으로 가려는데 아까 만해도 보이지 못했던 연분홍 폭스 글로브가 눈에 들어왔다.
시멘트 블록 틈으로 뿌리를 내린 것도 용한데 벤치 모서리에 있는 1cm의 틈을 발견하고 분수처럼 치솟았다. 한 달째 비가 내리지 않아 바짝 마른땅이었는데 폭스 글로브라니. 경이로웠다. 그는 숨 쉬기를 놓지 않았다. 온몸을 다해 줄기와 잎새를 쭉쭉 뻗어 갔다. 마치 햇볕에 닿으면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걸 알았던 것처럼.
"나와서 햇볕 좀 쬐렴."
새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해는 내 머리 바로 위에 올라와 앉았다. 바람은 서늘한데 해의 온기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깊게 스며들어 온몸이 따뜻했다. 너무도 가까우면서도 머나먼 땅에 살고 있을 얼굴 모를 지연과 찬호와 명숙이 떠올랐다. 다만 스코틀랜드의 바람이 나의 안부를 그들에게 전해주면 좋겠다.
우리 같이 햇볕을 맞아요. 그리고 숨 쉬기를 놓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