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라는 숲
세상은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세상엔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현재 시대엔 내가 아닌 다른 것에 둘러싸인 것을 이질적으로 이야기한다. 언어적으로 맞기는 하다. 내가 아닌 것에 둘러싸여 있는 기분은 이질적이다. 내가 아닌 것이 내 영역까지도 침범해 있는 느낌이 다분하니까. 내가 가진 영역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내가 서있는 지금 이 자리인가. 내가 앉아있는 좌석의 정도인가. 아니면 내가 사는 지역의 영역인가. 잘 모르겠다. 내가 나의 영역을 찾는 것 자체가 이상하리만큼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지금은 오후 아홉 시다. 나는 내 방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쓰고 있다. 유튜브로 낮고 잔잔한 피아노곡을 듣고 있다. 조용히 쓰고 있는 글에 집중하고 있다. 나의 손의 움직임. 그전에 미리 작동된 나의 사고구조. 주제에 대한 깊은 생각. 그리고 작성되는 글의 형태. 모두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 같게 느껴진다. 그러나 조금만 고개를 들고 조금만 귀를 열어도 나의 공간에 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도 느낄 수 있다. 윗집에 남자아이 세 명이 사는데 늦게까지 자지 않는다. 여전히 들리는 발소리와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있다. 글을 쓰기 위해 켜둔 유투부의 피아노 플레이리스트 역시 누군가가 세심하게 그리고 정교하게 짜둔 고뇌의 흔적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이 유투버는 실제 스스로 피아노음을 스스로 연주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단지 유튜브에 갇힌 음이라고 한들 나는 이 유투버의 생각을 따라 움직인다고 느끼는 편이다. 고개를 들어 창을 보니 흐릿한 산의 능선영역 위로 낮은 고도에서 비행하는 비행기가 보인다. 그 속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겠지. 맞은편 빌라엔 제일 높은 층에 한 집, 중간층의 한집 불이 켜져 있다. 높은 층의 집에선 항상 아주머니가 부엌일을 하고 계시고 중간층의 집엔 중년의 아저씨가 웃통을 벗고 컴퓨터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듯 내가 나만의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여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영역은 실시간으로 확장되고 축소되기는 한다. 누군가가 나의 영역 속에 같이 있는 듯해도 글을 쓰는 데에 온전한 집중을 할 때면 오롯이 나만이 있다고 느낀다. 집중이 풀리면 또 다 같이 생활하는 주택 속에 내가 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 속에서 또 나의 공간 속에서 서로 다른 것들을 느끼고 경험하고 잠시 잊고 또 합쳐지는 것이 삶의 형태 같다. 그래서 사실 요즘 대세인 '나 자신을 찾기.', '나만의 시간을 갖기.'라는 류의 활동에 오롯이 혼자가 되기는 정말 쉽지 않다. 깊은 산속의 산장에 가서 혼자 책을 보더라도 산장의 주인과의 관계, 핸드폰을 꺼두지 않는다면 누군가에게 자신이 산장에 있음을 알리기에 위치적 고립은 있을지언정 정신적 고립은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
문제랄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살아가는 공간 혹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영역 속 타자가 존재하는 것은 진실로 자연스럽다고 말하고 싶었다. 여기서 더 추가하자면 나의 생각은 꼭 나의 생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씩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내가 하루키 같다. 웃기는 얘기지만 내가 가진 책장의 절반이상이 하루키의 책이다. 그리고 하루키의 책은 적어도 한 권당 세 번 이상은 읽었다. 그래서 사실 내가 하는 말과 생각엔 하루키의 정신세계가 깊게 침투되어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자면 하루키의 소설 속에선 주인공은 항상 생각보다 무기력하기도 하고 변화에 둔감하기도 하고 불안정한 삶의 형태와 침범 속에서 구태의연하게 자신의 생활을 지키려 노력한다. 그것도 매우 치열하게. 그러나 누군가 보았을 때 그 치열한 보존의 자세는 별것 아니다. 빨래 하기. 샤워하기. 면도하기. 스스로 요리해 먹기. 그런데 웃기게도 나 역시 그러고 산다.
핸드폰을 많이 본 날이면 핸드폰을 멀리 던져두고 생활을 챙긴다. 집안 청소라든지 쓰레기를 모두 모아 버려 버리든지. 시간을 들여 샤워를 한다든지. 운동을 최우선으로 먼저 하러 나간다든지. 누군가는 나의 삶의 형태를 당연한 삶이라고 치부하겠지만 나는 나의 삶을 지키려 치열하게 나의 생활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간엔 분명 하루키가 있다. 자 그럼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형태는 정말 내 것일까? 나는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물론 '하루키가 그렇게 살았으니 나도 그렇게 해야지!'라는 생각은 아니다. 오히려 하다 보니 '이런 생활이 좋다.'라는 감각에서 지금의 나의 삶의 형태가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위에서 말했지만 그 중심엔 타자인 하루키의 영향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오히려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보다는 나는 그것이 내 눈엔 빛나는 별자리 같다.
내가 하루키의 영향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 가지다. 자신을 지키려는 자의 글을 믿을 뿐이다. 그의 삶을 보면 새벽에 일어나 글을 몇 시간 쓰고 잠시 쉰다음 운동을 한다. 그리고 오후에 잠시 잠을 자거나 음악을 듣고 밤이 되면 맥주를 먹고 잔다. 일정한 삶의 형태다. 그리고 그의 글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화자들을 본다. 그런 글의 영향력을 수도 없이 받았다.
자 다시. 지금 나는 나의 삶의 형태를 분명 나의 것이라 할 수 있나. 그것은 맞다. 그러나 내가 온전히 만든 것인가. 에는 아니다. 하루키를 예시로 들었지만 나의 아버지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지독한 책벌레였다. 그것이 내게 아버지가 준 최고의 유산일 것이다. 삶이 흐트러졌을 때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선택하는 것 중 하나가 독서다. 나를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영향 역시 지금의 나를 이루는 토양일 것이다. 나는 나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런 시야는 독선이고 자만으로 느껴진다.
지금의 삶의 형태를 띠기 전,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내가 영향을 받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러나 지금의 와서 다시 돌아보니 누군가의 영향을 내가 잘 흡수했겠거니 싶다. 거를 것도 걸렀겠지만 모든 거름망이 그렇듯 모든 것을 거를 수 있는 거름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독선적으로 살고 싶지 않고 자만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 탈무드에서도 '모든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자가 가장 현명하다.'라 했다. 몇 년이 지나 또 나는 변해있겠지. 그것을 나도 나겠지만 나의 주변에 있는 숲에서. 타자라는 숲에서 내가 많은 자양분을 얻은 것이겠지.
오히려 나라는 자만에 빠지지 않으니 그 또한 감사한 요소다.
내 주변엔 좋은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