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속 바디 포지티비티
그림책의 매력 중 하나는 불편하고 난처한 주제를 다루는 귀엽고 온화한 방식이다.
피비 왈이 쓴 <헤이즐의 봄 여름 가을 겨울>에서 헤이즐은 요정이라는 깜찍한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숭숭 돋아난 다리털과 앙증맞은 뱃살을 내보인다.
그 신비로운 숲 속에는 거북이 등딱지에 앉아 한쪽 가슴을 드러낸 채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엄마도 있고,
긴 머리를 늘어뜨려 화관을 쓴 아름다운 남자요정도 보인다.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아기를 품에 안은 쥐 아빠의 다크서클은 애잔한 동지애를 불러일으킬 정도다.
전통적인 성 역할과 규범, 획일화된 미의 기준, 오래된 가치관에서 아마도 정 반대에 위치할 것 같은 이런 등장인물들은 유연하고 보드랍게 파괴시킨다.
당신이 굳건하게 믿고 있는 어떤 논리나 가치관들이 정말로 옳은 것일까?
피비는 팟캐스트 <Book Friends Forever>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나처럼 생긴 통통한’ 공주는 어떤 그림책에도 등장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게다가 지금도 뚱뚱한 캐릭터는 자주 악당이 되어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녀는 다양한 신체를 가진 요정들을 그림책에 가득 채워 넣었다.
한 명 한 명 있는 그대로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 말이다.
당신과 나처럼.
아이가 5살 때 유치원 친구 중에 인어공주처럼 붉은 머리에 곱슬곱슬한 웨이브를 가진 친구가 있었다.
아이는 자기 머리도 그 친구처럼 구불구불한 웨이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아이의 긴 생머리를 촘촘하게 땋은 후 풀어서 다소 원시적인 ‘웨이브’를 만들어 주었고 아이는 거울을 보며 만족스러워했다.
다음날에도 땋아서 웨이브 만들어줄까? 물었더니 됐단다.
그냥 자기 원래 머리스타일이 더 좋다고 했다.
반에서 유일한 동양인인 아이가 일종의 소외감 같은 걸 느끼게 될까, 같은 왜곡된 고민을 하며 도서관 그림책장을 유심히 바라보던 어느 날 나는 완벽한 책을 발견했다.
도서관은, 언제나 그렇듯, 나에게 필요한 답을 갖고 있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수영복만 입고 유영하는 타일러 페더의 <Bodies are Cool, 모든 몸은 멋져>의 표지에서 단연 눈을 끈 것은 시원하게 겨드랑이 털을 내보이며 팔을 번쩍 들어 올린 여성이다.
나는 이미 이 책이 마음에 쏙 들었다.
책 속에는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게 될, 혹은 아직 마주친 적 없는 수많은 몸에 대해서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어떠한 은유나 미화 없이 매우 직관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비롯한 친구들과 가족,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된다.
우리는 타인의 몸을 훑어보며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 그림책을 보면서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다.
겨드랑이 털의 존재에 호감을 갖던 나와는 다르게 아이는 발레 하는 여성의 허리에 꽂힌 인슐린 측정기를 가리켰다.
“이거 캐시 할머니거랑 똑같네”라고 말하며 그녀도 역시 당뇨병을 갖고 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시어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유전으로 인한 당뇨병을 갖고 계시기에 늘 허리춤에 인슐린 측정기를 꽂고 다니신다.
그 손바닥만큼 작은 기계에서 ‘삐삐삐’ 소리가 나면 시어머니의 몸속의 어떤 수치가 너무 높거나 낮다는 의미이므로 가족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그녀를 살핀다.
혈당이 너무 낮으면 바나나나 건포도를, 너무 높으면 걷기 운동을 함께한다.
평생을 당뇨라는 친구와 함께 살아온 그녀는 자연식물식단을 유지하며 70대의 나이에도 스키와 하이킹을 즐기고 여름이면 숲으로 캠핑을 떠난다.
자기 자신과 사이가 좋은 어른은 스스로를 잘 챙기고 돌본다는 것을 그녀에게 배웠다.
같은 페이지에서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사람은 의족을 착용한 채 우아하게 두 팔을 올린 앙오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할머니다.
튼튼한 팔뚝에 새겨진 큐피드의 하트, 꽃 문신과 멋스럽게 땋아 올린 흰머리는 그녀가 자신의 취향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또 다른 어른이라는 걸 말해준다.
<Bodies are Cool, 모든 몸은 멋져>에서는 디즈니 영화에 등장할법한 완벽한 프린세스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백반증, 주근깨, 사시, 왜소증, 통통한 뱃살, 문신, 흉터들이 난무하며 이 몸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럽냐고 묻는다.
그것이 불편하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는 이유는 발랄한 그림체와 함께 기발하게 숨겨놓은 디테일 덕분이 아닐까.
예를 들어 다양한 피부톤을 보여주는 페이지에서 사람들이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 맛과 그들이 가진 피부톤은 공통점을 갖는다.
또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은 각자 함께 있는 반려동물과 묘연하게 닮아있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그것은 안도감과 함께 나 자신으로 사는 즐거움을 비로소 깨닫게 해 준다.
니 몸 내 몸은 다 다르고 그 자체로 멋지다!
한국 청소년들 사이에서 ‘프로아나’, 먹토’, ‘뼈 말라’라는 신조어들과 함께 죽음의 다이어트가 유행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프로아나(Pro-Ana)’는 찬성을 의미하는 ‘프로(Pro)’와 거식증을 의미하는 ‘아나(Anorexia)’의 합성어로 거식증을 동경한다는 의미다.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하며 저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단식은 물론 먹고 토하기, 약물사용 등 위험한 방법도 동원된다. 많은 아이들이 대중매체 속 아이돌처럼 되고 싶어 한다.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구축해 놓은 새하얗고 가녀린 체형의 걸그룹이라는 획일화된 미의 기준을 쫒는다.
‘그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강박, 동경, 불안이 사회 전반에 깔려있다.
하지만 우리는 나 자신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행복해지고 타인과도 건강하게 연결될 수 있지 않은가.
넌 세상에 하나뿐이며 그 자체로 이미 특별하다고 말해주는 그림책들을 더 많이 필요한 까닭이다.
<B Is for Bellies (A Celebration of Every Body!)>는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스스로 사랑하고 돌보는 방법을 어린이들의 시선에 맞게 알려준다.
알파벳 순으로 차근차근 말놀이처럼 이어지는 스토리에서 A는 네가 보는 모든 몸들(All the bodies you see), B는 뱃살(Bellies), C는 변화(Change), D는 다양성(Diverse)을 상징한다. 내가 뭉클해진 건 Y의 순서였다.
Y는 You.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기에 너는 너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란다.'
나는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나로 사는 방법을 터득했다. 지금도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관찰하고 배우는 중인데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긴 하다.
야행성인줄 알았던 나는 사실 새벽형 인간이었고, 늘 복잡했던 머릿속은 8시간 수면시간을 확보한 후 맑아졌다.
매일 한잔의 케일스무디는 30여 년을 고통받던 만성변비에서 탈출시켜 주었으며(케일만세!), 하루 세잔 마시던 커피를 한잔으로 줄이고 나서 불면증이 사라졌다.
술은 완전히 끊었고 (미국의 비싼 물가에 어쩔 수 없이) 집밥을 만들어 먹으며, 간단한 쿠키와 애플파이정도는 구울 수 있는 홈 베이커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고작 이런 작은 성취들로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길 줄 아는, 야망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도 마음에 든다.
20대에 가졌던 근거 없는 자신감과 야망은 실행력과 인내심이 없는 이들에게는 때론 절망과 원망을 초래하니까.
내 뱃살은 마음과 일상의 평화를 상징한다.
누군가에겐 11자 복근을 만드는 것보다 변비탈출이 더 시급한 사항일 수 있으니 말이다.
당신의 뱃살에 친밀한 안부를 보내며,
오늘도 당신으로 경쾌하게 살아내길.
<바디 포지티비티 영어그림책 목록>
Bodies Are Cool- Tyler Feder
B Is for Bellies (A Celebration of Every Body!) - Rennie Dyb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