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옆에서
비 내린 가을 아침의 숲에
맑은 바람이 숨 쉬고
조는 듯 홀로 서 있는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비탈진 오솔길 끝자락에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보이지 않는 새소리가 꽃가지를 흔든다.
가지 끝마다 펼쳐진 진분홍 꽃숭어리 사이로
구월의 파란 하늘과 구름이 머무는 듯 흘러간다.
우리도 이 땅에 그저 서성이다 돌아갈 것이지만
나도 너처럼 한 백일 열렬히 꽃 피울 수 있을까
어제 꽃 한 송이 지고
아무도 모르게 오늘 꽃 한 송이 피어
일백일을 서로 마주 보며 꽃 피우는 것을 보면
꽃은 그 어떤 고백도 맹세도 없이
제 스스로 피고 지는 것일 뿐이다.
삼백예순날 이슬이 고이고 고이면 진분홍꽃이 될까
배롱나무꽃 뚝뚝 지는 숲 속에서
지난날을 가만히 내려놓으면
나도 너처럼 한 백일 열렬히 꽃 피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