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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Oct 18. 2024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브람스의 가을편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사용해

당신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클라라 슈만에게 보낸

   브람스의 편지*

      1855년 10.


가을은 잠깐 들렀다 가는 사랑방 손님이다. 카페에 앉아 이야기 좀 나누자고 권유해도 수줍게 사양한다. 외려 떠나버리기 바쁘다.


음악가 브람스가 그런 사람이다. 가을과 함께 찾아와 불쑥 얼굴 한 번 내밀더니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잠깐 비쳤다 소멸하는 계절, 가을은 산사의 종소리처럼 인생의 덧없음을 알린다.


브람스는 가을의 고독을 긁어모아 자신의 음악 속에 수놓은 인물이었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처럼 그는 자기 음악을 들어 달라며 멋쩍게 웃고 있다.


브람스가 남긴 모든 작품은 덧없음의 양조장에서 빚어낸 와인과 같다. 음표 하나하나 마다 그가 숙성시킨 와인 향이 가득하다.


그의 음악의 오크통 속엔 우수와 쓸쓸함이 진하게 녹아 있다. 외로움으로 발효된 맛이 너무 강해서일까.


와인향이 코 끝에 스치는 순간 슬픔의 눈물이 비처럼 쏟아진다. 금방이라도 피가 솟구쳐 올라 격한 비장감으로 취할 것 같다.  


진홍빛 낙엽이 거리를 뒹굴면 가을은 떠날 채비를 서두른다. 거리의 핑크빛 가로등이 비를 맞고 서 있는 밤에 길을 나선다. 브람스의 음악이 연인이 되는 순간이다.


늦가을 황량한 들판에 서리가 내리고 갈까마귀 떼들이 서둘러 길을 재촉할 때면 그의 선율은 가슴 절절히 스며들어 적막감에 몸을 떤다.`


브람스의 음악은 가을에 드리는 기도요 가을에 만나는 사랑이다.


그의 인생 한가운데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슈만과 클라라였다. 모두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저들이 머문 자리엔 낭만과 사랑의 흔적들이 가을 낙엽처럼 수북이 쌓여 있다.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이었다.


1896년의 일이다. 심술 맞은 사월의 바람이 알프스 언덕의 꽃을 만지던 날, 브람스에게 급한 전보 한 통이 날아들었다.


독일 뒤셀도르프에 있는 클라라가 위독하다는 전갈이었다. 그가 머물던 오스트리아의 시골 마을 바트 이슐에서 거기까지 가자면 난감한 일이었다.


브람스가 뒤셀도르프에 도착해 보니 클라라는 이미 사망했고 장례식까지 마친 후였다. 1896년 10월의 일기에는 그때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었고

가장 위대한 가치이자

가장 고귀한 의미를 잃었다

오 클라라

당신이 없는 삶

나는 외로워서 어떻게 산단 말이오.


사랑이 깊고 클수록 상실감은 거기에 비례한다. 예술가라면 그런 정서가 작품 속에 녹아든 건 당연한 일일 터.


 그래서일까. 브람스의 창작물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순수함이 있다. 클라라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사랑의 음향은 울리다 사라지는 에코가 아니다. 단지 찬양의 되울림으로 끌어 오르는 그 무엇이다.


일기에는 한 인간의 부서진 마음 조각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조각의 마음은 경이로운 죽음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지 않은가.


비 오는 날 레인코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여인처럼 그의 음악은 스산한 가을에 잘 어울린다. 그것에 대한 증거는 일기 한 토막으로 충분할 것 같다.


클라라가 떠난 후 삶의 공허감에 몸부림치던 요하네스 브람스. 일 년도 못되어 그 역시 가장 사랑했던 여인의 뒤를 따랐다.


 여기서 잠깐 브람스 슈만 클라라가 서로 만나 음악의 열정과 사랑을 이루던 뒤셀도르프 시절로 가보겠다.


아름다운 오월

모든 꽃이 필 때

내 마음속에는 사랑이 싹튼다

아름다운 오월

모든 새가 노래할 때

나는 그 사람에게

내 마음속을 털어 넣고 말았네.

*가곡, 시인의 사랑 Dichtersliebe*

  로베르트 슈만 1840년.


슈만과 클라라에게 천신만고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는 시간이 찾아왔다. 1840년은 두 사람 생애에 사랑의 꽃이 만개한 시절이었다.


위의 시는 둘만의 꿈같은 시간, 영원할 것 같은 행복 속에서 탄생한 노래다. 가사처럼 오월의 미풍이 슈만과 클라라의 가정을 보듬어가듯 행복으로 넘쳐났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이 집에 낯선 방문객 한 사람이 찾아왔다. 슈만이 제자로 삼은 브람스였다.


나이는 불과 십 대 후반이었으나 이 젊은이는 점차 스승의 아내 클라라에게 기우는 사랑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행복의 꽃이 활짝 핀 이 가정에 불행의 신이 들이닥친 건 바로 그때였다.


정신병과 우울증을 앓던 슈만이 라인강에 자살을 꾀한 후 끝내 사망하고 만 것이다.


 이때부터 브람스가 이 가정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로 나서면서 클라라를 향한 사랑은 더 깊어만 갔다.


1855년 10월 클라라에게 보낸 가을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사용해

 당신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가련한 사나이 브람스. 가슴에 끓어오르는 애절한 편지도 클라라의 마음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편지는 계속되었지만 사랑은 불러오지 못한 것이다. 


편지지에 묻은 잉크는 말라갔어도 클라라를 향한 사랑의 불길은 거세게 타올랐다.


창문을 가린 두터운 틈으로 인생의 황혼빛이 스며들 때 그의 음표들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려졌지만 죽어가는 그의 침상에는 천상의 음악이 맴돌고 있었다. 사랑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우리는 이 시대를 지나면서 저들이 남긴 사랑의 찬가를 듣고 있다. 삶의 쓸쓸함과 덧없음. 여기에 못다 이룬 사랑을 주제로 한 삼중주라 할까. 


겨울로 접어든 가로수길을 걷듯 공허감이 밀려오는 사랑의 삼중주 말이다.



슈만이 클라라에게 남긴 사랑은 클라라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슈만에 대한 클라라의 사랑은 브람스의 애간장을 녹였지만,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사랑은 일평생 안고 가야 할 가슴앓이였다.


브람스 음악이 빚어내는 생래적 우울감과 쓸쓸함은 일생을 통해 전개된 그의 짝사랑의 흔적일지 모른다.


우리는 저들 인생이 창작한 사랑의 멜로디를 들으며 눈시울을 적실뿐이다.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 그들의 사랑은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이었다. 브람스의 편지가 보여주듯.


낙엽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계절이 왔다. 시간이 여울지는 길목에 서서 다시 한번 인생의 덧없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다.


이런 정서 속으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요하네스 브람스의 음악은 가을이 주는 강력한 충격이요 아픔이다. 또 한 번의 가을이 이렇게 가고 있다.


글을 작성하다가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지난날 추억을 불러오는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패티 김 선생이 부른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이었다.


팔십 중반에 이른 나이에 세월의 아득한 벽을 뛰어넘는 감동의 열창이 거기에 있었다. 저 중후한 감성과 내공의 깊이는 오히려 젊은 시절의 성량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분의 라이브 공연에서 브람스의 일생이 겹쳐지는 건 필연이 아닐까 싶다.


그 무엇이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을까. 이 노래 말고.


가을이 익어가던 10월의 어느 날 알프스의 작은 마을 바트 이슐에서 브람스가 클라라를 향해 펜을 들었을 때,

옳거니! 바로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사랑할수록 깊어가는 슬픔에

눈물은 향기로운 꿈이었나

당신의 눈물이 생각날 때

기억에 남아있는 꿈들이

눈을 감으면 수많은 별이 되어

어두운 밤하늘에 흘러가리

아 그대 곁에 잠들고 싶어라

날개를 접은 철새처럼

눈물로 쓰여진 그 편지는 눈물로 다시 지우렵니다

내 가슴에 봄은 멀리 있지만

내 사랑 꽃이 되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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