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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아빠 Oct 08. 2022

풍설야귀인 (최북)

지나간 것을 가르치니 다가올 것을 아는구나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 최북 (출처 : 공유마당,  CC BY)


자공이 물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그 정도면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못하구나.”

(학이편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자공왈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자왈 가야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공자는 질문에 대하여 “맞다” 혹은 “아니다”라는 뻔한 답변 대신 결이 다른 말로 사람을 깨우치게 만드는 탁월한 재주를 지녔습니다. 이 구절은 내용을 점층적으로 발전시킨 구조입니다. 더불어  ‘하지 않으면 어떠냐’는 부정형의 물음을 ‘즐기는 것’과 ‘좋아하는 것’처럼 긍정형으로 답하여 주제의 본질을 바꾸는 묘미가 맛깔납니다. 좋지 않은 행위를 하지 않는 수동적인 자세보다 능동적으로 좋아하고 즐기는 삶을 더 우위에 둔 내용이 곱씹어 볼만합니다.


 위 구절의 후반부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공자의 대답을 들은 제자는 이렇게 다시 물었습니다. “《시경》에 나오는 ‘자르고 갈아 낸 것처럼, 다듬고 광을 낸 것처럼’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입니까?” 이 말을 듣고 공자가 답했습니다. “사야 이제는 비로소 너와 함께 《시경》을 논할 수 있게 되었구나. 지나간 것을 가르치니 다가올 것을 아는구나.”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자공왈 시운 여절여차 여탁여마 기사지위여 자왈 사야시가여언시이의 고저왕이지래자)


 자공이 인용한 시는 위풍(衛風, 위나라의 노래) 중 기욱(淇奧 기수강의 물길)의 첫 부분입니다, 이 시는 본래 위나라의 제후였던 무공(武公)을 찬양한 노래라고 합니다. 시에 등장하는 ‘자르고 갈아낸 것처럼’은 뼈와 뿔 같은 재료를 이용하여 공예품을 만드는 과정이고, ‘다듬고 광을 낸 것처럼’은 옥과 돌을 가공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시의 내용은 아름답고 멋진 남자의 외모를 정성스럽게 다듬어 만드는 공예품의 제작 과정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자공은 스승의 답변을 듣고,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태도의 문제를 배움의 과정으로 확장시켰습니다. 능동적으로 즐기는 자세에 정성껏 다듬듯이 수양한다는 의미를 보탰습니다. 여기에서 공예품을 만들듯이 자르고, 다듬고, 광을 내는 과정처럼 학문과 성품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고사성어가 나왔습니다.




 서양에서는 스스로 자신의 귀를 랐다고 알려진 고흐가 대표적인 광기의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흐는 현재 최고의 화가로 칭송을 받지만 살아 있을 때에는 작품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1,0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지만 살아 있을  판매가  작품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고흐는 화가의 길을 선택한 이후  가난에 쪼들렸습니다. 싸고 독한 술에 의지하며 살다가 정신병에 시달리고, 37살의 나이에 총상으로 사망하는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최북은 고흐와 비교될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조선의 화가입니다. 그는 작품의 청탁을 거절당한 사람이 협박하자, 분노하여 스스로 송곳을 이용해 한쪽 눈을 찔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최북은 이 일로 한쪽 눈을 잃었습니다. 미천한 출신이었던 최북은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만 내키지 않으면 작품을 팔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남의 비위를 맞추지 않는 성품과 규범에 구속되지 않는 삶을 선택하여 한쪽에서는 괴짜로 통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당당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최북은 아침에 그림을 하나 팔아서 밥을 얻어먹고, 저녁에도 하나 팔아서 밥을 얻어먹는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매일같이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는 평범하지 않은 언행이 기록으로 전해져 오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행동은 금강산의 구룡연에 몸을 던진 사건입니다. 최북은 술에 취해 울고 웃다가 불현듯 천하의 명인은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며 연못으로 몸을 던졌는데 다행히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는 죽음마저도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열흘을 굶다가 한 점의 그림을 팔고 술에 취해 성 모퉁이에서 쓰러져 눈에 묻힌 채 얼어 죽었다고 합니다.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은  ‘눈보라 치는 밤에 돌아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그림은 최북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데 붓이 아니라 손가락을 사용해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손에 먹을 묻혀 그린 그림을 지두화(指頭畵)라고 합니다. 그림의 소재나 표현이 모두 최북을 닮았습니다. 주변의 배경은 모두 황량하고 인물은 왜소합니다. 사람이 포근히 쉴 수 있는 초가집은 잘 드러나지 않고, 꼬리를 흔드는 개만 신이 난 것처럼 보입니다. 커다란 나무가 꺾일 정도로 바람이 거세지만 등이 굽은 노인은 조금씩 제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제목으로 사용된 풍설야귀인은 중국 당나라의 유장경(劉長卿)이 쓴 시 봉설숙부용산(逢雪宿芙蓉山 눈을 만나 부용산에서 묵다)에서 가져왔습니다. 시의 내용은 '날이 저무니 푸른 산은 멀구나. 날씨가 추워지니 집은 더 가난하구나. 사립문에 개 짖는 소리 들린다. 눈보라 치는 밤이 되니 누가 돌아오나'(日暮蒼山遠 天寒白屋貧 柴門聞犬吠 風雪夜歸人 일모창산원 천한백옥빈 시문문견폐 풍설야귀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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