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에서 시작된 삶 28
(낯선 나라에서 어제처럼 또 안녕하게)
이주민으로 이집트에서 한 달을 살아보니, 생각보다 이곳은 안전한 나라였다. 겁 많은 나는 오기 전부터 바짝 긴장하고 걱정했다. 개발도상국인 이 나라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을까? 중동의 영향권 아래 있는 아프리카 땅에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런 불안 속에서 시작한 일상. 이제는 조금씩 긴장의 끈을 놓고 이곳의 하루하루를 누린다. 혼자 택시를 타고, 저녁 장을 보고, ATM에서 돈을 찾고, 개와 고양이 옆을 자연스럽게 지난다.
이곳에서는 앱을 통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택시를 탈 수 있다. 물론 여행객들은 바가지요금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최근 이집트를 여행 삼아 방문한 지인은 택시비 흥정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갔다. 그러나 이곳의 ‘주민’으로 살면 이야기가 다르다. 카드로 이미 흥정된 금액을 결제하니 가격으로 다툴 일도, 팁 줄 일도 없다. 한국의 카카오택시처럼 집 앞에서 타고 목적지 앞에서 내린다. 끝자리까지 자동 계산되니, 인사만 나누고 쿨하게 문을 닫으면 끝이다.
한국보다 늦은 시각인데도 거리는 활기차다. 내가 사는 건물 1층에는 디저트 가게들이 여럿 있다. 젤라토, 카페, 슈크림 빵, 피자, 초밥집, 슈퍼마켓까지. 그중 시리아 디저트 가게는 단연 인기다. 늦은 밤까지 야외 테이블에서 사람들의 수다 소리가 이어진다. 처음엔 신경 쓰였던 그 소리가 이제는 정겹다. 사람을 만나면 행복해지는 풍경이 한국과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니, 근처에서 술집을 본 적이 없다.
무슬림이 아닌 여성들은 히잡 없이 자유로운 복장으로 다닌다. 대부분 긴소매와 긴 바지의 단정한 차림이다. 민소매 티셔츠나 슬림한 원피스로 멋을 낸 이들도 종종 보인다. 뚜렷한 이목구비의 여성들은 TV 속 연예인 같다. 젊은 여성 택시 기사를 처음 만났을 땐, 마치 비행기 승무원을 만난 듯 반가웠다. 어색해하는 기사에게 나도 모르게 아는 단어를 총동원해 말을 걸었다. 직장을 다니며 우버 운전을 병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ATM에서 현금을 찾을 때면 괜히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이제는 마음을 조금 놓고 자연스럽게 기계를 이용한다. 공공장소 곳곳에는 경찰이 배치되어 있다. 슈퍼마켓 안에도 ATM이 있어 편리하고 안전하다. 곳곳에 설치된 보안 카메라도 안심하게 한다. 작동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존재 자체로 범죄 예방에 한몫하리. 내가 사는 건물 엘리베이터 앞에는 층마다 카메라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이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개들은 대부분 귀에 인식표를 달고 있다. 한낮이면 수풀이나 길가에서 곤히 쓰러져 잠든 모습. 의외로 온순하다. 중성화 수술과 약물 처방을 통해 관리받는다고 들었다. 카이로 도심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도착한 다음 날 새벽부터 요란하게 짖어대는 개들 때문에 일어나 창을 열었다. 작은 사거리 한복판에서 암사자처럼 당당한 여섯 마리 개가 한참 동안 몸싸움을 벌이더니 잠시 후에는 뿔뿔이 흩어졌다. 다음 날엔 전날 보았던 여섯일곱 마리가 공사용으로 쌓아놓은 모래더미 위에서 신나게 모래놀이를 했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자신의 장소를 찾아 놀이터를 떠나는 아이들처럼 귀가한다. 며칠간은 이 녀석들 구경으로 아침이 바빴다. 그 이야기를 들은 거주 5년 차의 한국인이 말했다.
“이곳은 개도 고양이도 잘생겼죠?”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딜 때, 나는 움츠려 있었다. 가장 큰 걱정은 ‘안전’과 ‘건강’이었다. 이집트행을 앞두고 대상포진을 포함해 무려 일곱 가지 예방접종을 했다. 개들이 많다는 말에 한국에서 광견병 예방접종을 알아봤다가, 30만 원이란 비용에 결국 포기. 현지에서 접종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엔 길에 누운 개들을 피해 소리를 지르며 지나갔다. 지금은 작은 고양이를 보듯 아무렇지 않게 지나친다. 이곳 사람들이 동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태도에 나도 점차 적응하는 듯하다. 야외 레스토랑 테이블에 고양이가 올라와도 침착하게 쫓아내고 말이다.
오늘 아침은 집 앞에서 택시를 타고 5분 거리의 빌라 카페를 일부러 찾았다. 55파운드를 결제(약 1,500원). 실내는 스타벅스처럼 단정한 테이블이 놓였고, 야외엔 자갈 바닥에 하얀 차양 우산 아래 테이블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국에서도 인기 있을 법한 구조와 분위기. 차근차근 한국어로 대화하는 여성 둘, 둥근 테이블에 두건을 쓴 여성과 자유로운 복장의 젊은 여성들, 창가 테이블에는 노트북을 펼친 남성 둘이 조용히 작업 중이다. 야외 의자에는 둘셋씩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카페 문 옆에서부터 안쪽까지 길게 놓인 대리석 벤치와 그 앞에 높인 여러 개 1인 테이블. 화분 옆 구석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카운터로 향했다.
“핫 라테, 원 브라우니.”
카드를 꺼냈더니 현금만 된단다. 245파운드(약 7,300원).
연두색 핸드백에서 200파운드 지폐 두 장을 꺼내 자연스럽게 잔돈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마치 이곳에 오래 살아온 사람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분위기를 누리고, 오늘의 할 일을 시작한다.
그냥 어제처럼, 또 안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