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에서 시작된 삶 29
알람이 울리지 않아도 눈이 떠지는 아침 여섯 시 반. 부엌으로 서둘러 나가 도시락 준비한다. 어떤 날은 치즈와 채소를 넣은 샌드위치, 어떤 날은 이집트 쌀로 지은 밥에 반찬을 곁들인다. 간단한 김밥을 싸기도 하고, 소고기 달걀 장조림이나 멸치볶음을 반찬으로 더한다. 특히 소고기 볶음 고추장에 현지 야채를 볶아 준비한 비빔밥은 딸에게 최고 평점을 받았다. 음식량을 넉넉히 챙겨 한국 직원들과 나눌 수 있게 하는 날이면 더없이 기분이 좋다.
다시 도시락을 싸게 될 줄이야. 아이 도시락을 챙겨 학교에 보내느라 분주한 이곳 엄마들의 아침 풍경도 전해 듣는다. 균형 잡힌 영양을 챙겨 주던 한국 급식 시스템이 문득 떠오른다.
이곳에서는 그날 먹을 것만 사서 냉장고를 비워 보려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참기름, 간장, 볶은 깨, 된장, 고추장이 양념 칸을 차지하고 있다. 어제 끓여둔 미역국과 식초물에 씻어 놓은 작은 레몬, 볶음 멸치가 나란히 한 칸을 메운다. 사과와 오렌지가 과일 칸에, 절반 남은 양상추와 셀러리가 야채 칸을 자리하고 있다. 냉동실에는 선물 받은 케이크, 아이스크림, 볶아 소분한 소고기, 황태채, 고춧가루까지 들어 있다. 조금만 더 모이면 한국의 냉장고처럼 될 듯.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빈 공간을 만들자.
아침에는 다림질부터 서두른다. 정전 걱정 없이 스팀다리미를 쓸 수 있는 황금 시간대. 이집트는 한국과 같은 220 볼트다. 이곳에 오면서 성능 좋은 스팀다리미를 장만해 왔다. 막상 와서 사용해 보니 작동 불가. 한국에서 휴가를 마치고 들어오는 지인에게 부탁해 변압기를 전달받았다. 자동차 배터리만 한 크기에 무게가 11킬로. 전력 눈금을 3단계까지 올리고서야 완벽한 스팀 소리를 낸다. 방법을 찾아낸 이후로는 도시락을 싼 뒤 곧바로 다림질에 돌입한다.
세탁기를 돌려 건조대에 빨래를 널면 반나절 만에 바싹 마르는 옷가지. 비 한 방울 없는 이 나라에서 빨래 말리기는 최고다. 내 피부도 함께 바싹 말라가는 중이라, 들고 온 미스트를 자꾸 뿌리는 중이다.
이곳은 모래 먼지가 많고 매연이 심해 청소기를 매일 돌려야 한다. 한국에서 품고 온 물걸레 겸용 로봇청소기는 든든한 살림 동지다. 청소를 시작하는 장면을 찍어 소개 문구와 함께 가족에게 보냈더니 웃음을 터뜨린다
‘소중한 내 친구가 작동 중’
매일 아침 나와 함께 살림을 하는 짝꿍.
오후 세 시쯤 장을 보러 갈 때면, 돈을 쥐고 문구점에 가는 아이처럼 들뜬다. 이틀에 한 번씩은 까르푸에 들르는데, 때로 매일 가게도 된다. 특히 망고는 빠뜨리지 않는다. 이집트 망고는 한국 사과처럼 품종이 다양하다. 애플망고라 불리는 ‘나우미’와 ‘티무르’부터 향이 진한 ‘아이시’, 주스용 ‘즈브다’, 단맛과 신맛이 어우러진 ‘시나라’, 디저트용 ‘키트’까지. 허브와 채소 코너도 자주 구성이 바뀌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얼마 전, 지인이 이집트 여행 중 우리 집에 들렀다. 이집트 배추를 발견해 미역국 대신 시래기 된장국을 끓였다. 고된 룩소르 여행에서 이집트 음식만 먹던 이들은 비빔밥과 된장국에 환호성을 질렀다. 마음만 먹으면 한식을 만들 수 있는 이곳. 두 손 가득 고기와 채소를 사도 3만 원이 채 안 든다. 한국의 식자재 물가 이야기에 함께 걱정하다가도, 외로운 마음을 망고로 달래는 나.
“엄마가 오니 사람 사는 것 같아요.”
“엄마, 동료들이 장조림 정말 맛있대요.”
“이집트에서 이렇게 멋진 한식을 대접받다니, 고마워요.”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지만, 감탄은 이집트에 살러 온 아줌마를 살림하게 한다.
이집트 살림? 할 만해졌다.
살림은 단순히 끼니를 준비하고 필요를 채우는 일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을 잇는 다리다. 한 끼의 따뜻한 밥이 주는 위로는 먼 타국에서도 집안의 온기를 되살린다. 부드러운 수건, 깨끗한 방, 잘 다려진 옷은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살림은 가족에게 함께 살아가게 하는 기쁨과 힘을 준다.
이곳에서도 살림으로 나와 내 곁의 사람들을 살리고 있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