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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May 24. 2022

야나할머니의 박상

"나 너무 슬퍼"


"왜 무슨 일 있어?"


퇴근길 안부차 걸려온 동생 전화에 나의 첫마디는 나 슬프다였다.


"아니 우리 동네에 엄청 오래된 뻥튀기 집이 있어, 나의 힐링 맛집이었는데 그 집에 인테리어 가게가 들어왔네"


"난 또 뭐라고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슬프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래도 가끔씩 그 집에 들러 뭔가 사 오면 기분이 좋았는데, 어렸을 땐 먹으라 먹으라 해도 안 먹던걸 이제 먹게 될지 누가 알았겠어, 그때 좀 더 먹었더라면 키라도 더 컸을까?"


"크긴 개뿔, 살만 더 쪘을 거야. 그나마 덜먹어서 이만한 걸 지도 몰라"


"다행이라 해야 하나? 그런 건가?"


내가 개그맨 흉내를 내자 동생이 웃었다.


그리고 며칠 뒤,  퇴근한 나는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코에 들어오는 익숙하지만 퍼뜩 이해가 안 되는 구수한 냄새에 당황했다. 그리고 잠시 기억을 더듬어 '내가 아침에 뭘 해 먹고 갔었지?' 그리곤 바로 찾은 답. 나는 내 코가 코로나 감염자치곤 심하게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에 감탄하며, 식탁의자 위에 다소곳이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커다란 뻥튀기 자루를 마주했다. 어릴 땐 장에 다녀오시는 어른들의 손에 들려 있던 기억이 있지만 내가 성인이 되고선 본 적이 없던 아주 큰 자루였다. 


"우렁각시님 언제 다녀가셨대요?" 그리고 이건 뭘까요? 혹시 저를 사육하실 생각이신가요?"


"언니 퇴근했어? 뻥튀기 엄청 크지? 나도 시장에서 사서 주차장까지 들고 가는데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한 마디씩 하더라고. 뻥튀기집 없어져서 슬프댔잖아. 그거라도 먹고 힘내, 다 먹으면 또 말하고"


동생은 얼마 전 조만간 한 번 다녀가겠다고 말을 하더니 우렁이 각시처럼 오늘 낮에 다녀갔다. 아침에 내가 설거지통에 마구잡이로 담가 놓고 간 아침 밥상의 그릇들도 깨끗이 정리를 해두고, 코로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내게 그만 골골거리라며, 비타민C도 많이 먹고 햇빛도 많이 쬐라 당부하더니 역시나 내가 제 말을 안들을 것을 알았는지 오렌지랑 참외도 한 박스씩 내려놓고 갔다. 나는 눈으로 먹는다는 말이,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무얼 말하는지 이해하며, 점점 줄어드는 뻥튀기가 아쉬워 크기를 가늠할 겸 근처에 있던 리모컨을 곁에다 두고 사진 촬영을 해 두었다.


어린날의 산골엔 먹거리가 넉넉하지 않았다. 물론 옥수수, 고구마, 감자 등 익숙한 먹거리들은 일 년 내내 나를 따라다녔지만 배앓이를 자주 했던 나는 그 음식들을 즐겨 먹지 않았다. 그래도 겨울엔 이 강냉이로 만든 뻥튀기가 식구들의 대표 주전부리 중 하나였는데 할머니는 겨울밤 우리들에게


"야나 니 강네이 박상 물래?" 


라고 물으시면 그건 할머니 방에 놀러 오라는 신호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 할머니가 주시던 뻥튀기를 그리 애정 하진 않았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뻥튀기를 한 바가지 퍼서 군불을 땐 구들장 위에 다리를 뻗고 작은 담요로 덮고 앉아 있던 그 시간이었고, 할머니가 해주시던 다는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얘기였다.

6.25 전쟁을 겪었던 얘기, 할머니의 시집살이 얘기, 할머니의 친정 얘기, 그런 얘기들을 듣다 보면 어느새 뻥튀기 바가지는 비어지고 우리는 방문을 열고 마당에다 펄럭펄럭 소리를 내며 담요에 붙은 뻥튀기 부스러기들을 털어냈다. 그런데 뻥튀기의 단점은 지독하게 밀려오는 갈증이었다. 우리는 할머니 얘기를 듣는 도중에 계속해서 할머니의 자리끼 주전자 주댕이에 입을 대고 홀짝홀짝 물을 마시면서 목이 마르다 어리광을 부리면 할머니는 마지못해 가겟방에 가서 사이다를 사 오라며 전대 주머니를 여셨는데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겨울 밤길, 그리고 증조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를 지나가야 하는 나는 바로 밑에 동생 손을 꼭 잡고 집을 나서 가겟방 집이 불을 끄기 전에 서둘러서 다녀와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방에도 있던 똑같은 뻥튀기보다 할머니방 뻥튀기가 더 맛났던 것은 어쩌다 할머니가 큰맘 먹고 사주시던 사이다 한 모금 때문이었던 것 같다.


조용하디 조용한 산골의 하루를 시끄럽게 하는 날이 있었다. 동네에 뻥튀기 장수가 트럭을 몰고 와 하루 종일 "뻥이요"를 외치는 날이었는데 뻥튀기 장수가 차를 세우고 몇십 번의 "뻥이요"를 외쳐도 우리 엄마랑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친구네 엄마랑 할머니는 다 회관 마당에 나타나는데 왜 안 오냐고? 옥수수가 없으면 쌀이나 떡국떡이라도 튀기면 되지 않겠냐고 떼를 썼지만, 그해에 우리 집은 유독 가난했던 것 같다. 나는 동네 아줌마들이 주는 한 줌씩의 뻥튀기들을 주머니 주머니에 꾸역꾸역 집어넣다가 쓰고 있던 빵모자에까지 담기 시작했고, 하루 종일 회관 마당에서 기웃거리다 집 엘가면 쥔 종일 움켜쥔 빵모자의 털실들이 뻥튀기에 들러붙어 어쩔 수 없이 소가 먹을 구정물 통에 넣어야 했다.


세월 속에 우리 집엔 가족들이 점점 늘어났다. 큰 고모의 출산을 시작으로 마치 작정하고 짠 듯이 할머니의 5남매는 1981년 한 해에 동갑내기 아이들을 생산(?)해 나에게는 5명의 동생이 늘어났다. 그리고 초겨울을 알리는 어느 늦은 밤, 그 해의 출산 종료를 알리는 나의 막냇동생도 태어났다.                                           


할머니는 그렇게 자라는 손주들을 위해 쌀 튀밥을 튀어와 자개장 깊숙한 곳에 감춰두신 뒤, 그 투박한 손으로 손주들의 입에 쌀 튀밥 한알을 넣어 주시는 것으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가끔씩 친정에 들른 고모들의 아이를 돌봐 주실 땐 나에게 동생들 잘 보라는 당부와 함께 쌀 튀밥 봉지를 내 손에 넘겨주셨고, 나는 보행기를 타고 있는 동생들의 입에 쌀 튀밥 한알, 내 잎에는 한 주먹씩 부어 넣곤 동생들이 쌀 튀밥을 아주 좋아한다고 할머니한테 시커먼 보고를 했었다.


겨울이 점점 깊어갈수록 크고 빵빵했던 뻥튀기 자루가 흐믈흐믈 작아지면 조금씩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할머니는 기가 막히게 절기를 기억하시는 분이셨고 그 절기에 맞춰 뭐든 드셔야 하는 양을 잘 가늠하셨던 지혜가 있으셨다. 아마 넉넉지 못했던 살림을 사시느라 몸으로 터득하신 지혜였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날은 옥수수 가루로 만든 샛노란 뻥튀기를 사 오셨는데 빨리 먹기 아까워서 녹여 먹었던 나는 다음날 입천장이 벗겨져서 고생을 했었다. 그랬던 그 노란 뻥튀기를 언젠가 인사동에 가서 다시 보게 되었는데 짧게 절단하지 않고 길게 튀겨낸 속에 아이스크림을 채워 팔고 있는 것을 보고 기가 막히다 생각하며 먹어 보았다. 먹으면서도 혹시나 입천장이 벗겨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것도 세월 따라 진보를 했는지 다행히도 입천장은 벗겨지지 않았다.


동생이 사다 준 뻥튀기 한 자루. 그리고 떠오른 할머니와의 추억.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과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식탁의자에 앉아 있는 뻥튀기 자루를 보고 놀라 전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묻는다.


"설마 저걸 진짜 다 먹을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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