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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May 27. 2022

야나할머니의 감자 붕생이

할머니는 오늘도 무릎과 무릎 사이에 고개를 넣으신 채로 쪼그리고 앉아 반쯤 닳아 없어진 숟가락으로 감자 껍질을 벗기고 계신다.


"할머이 뭐 해 먹을라고?"


혹여나 특별한 메뉴가 나올까 싶어 잔뜩 기대한 목소리로 물으면


"감자 붕쉐이 해묵을라 그라지"


"에이, 감자 붕쉐이 말고 부치기 해 먹으면 안 돼?"


할머니는 대답도 안 하시고 계속 감자 껍질만 벗기셨다.


우리 집에서 먹던 감자의 요리법은 쪄먹거나 구워 먹거나 전을 부쳐 먹거나 채를 썰어 하얗거나 빨갛게 볶아 었는데 햇감자를 캐서 적당히 숙성이 되었을 무렵은 삼복더위가 한참이었고, 이열치열을 몸소 행하듯 뜨거운 감자 붕생이를 만들어 먹었다.


나는 감자를 강판에 곱게 갈아 바삭하고 쫀득한 감자전이 제일 맛있었지만 식구들의 입을 충당 할 만큼의 감자전을 부치려면 비료포대로 한 자루는 갈아야 하기 때문에 감자 껍질을 벗기는 일과 강판에 갈아야 하는 일은 엄마도 할머니도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믹서기로 윙~ 하고 갈아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땐 강판에 가느라 몇 시간씩 감자를 쥐고 있으면 감자가 갈리는 건지, 내 손이 갈리는 건지, 감자가 갈변해서 빨개지는 것인지, 내 피가 들어가 빨개진 것인지, 퉁퉁 불은 상처 난 손을 봐도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우리 집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감자 붕생이 요리법은 이랬다.

감자 껍질을 벗겨 냄비에 담고 사카린(인공감미료)과 소금, 물을 넉넉하게 넣고 삶는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감자가 익으면 그 끓인 물을 덜어내 감자전분을 섞어 반죽을 한 다음 수제비 떼 듯 뚝뚝 떼어 냄비에 다시 넣고 전분이 익을 만큼 뜸을 들여 꺼내 먹으면 포실포실한 감자의 식감과, 감자떡을 먹는 듯한 쫄깃함을 맛볼 수 있었다.


할머니가 기운이 있으실 때는 당신이 해 주셨지만 내가 중학생이 되고, 엄마가 들에 나가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시면 할머니는 내게 감자 붕생이를 주문하셨다. 아버지가 옥수수를 매일매일 드셔도 지겹다고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할머니는 감자 붕생이를 매일매일 드셔도 지겹지 않다 하셨지만 요리가 서툴었던 나는 할머니의 주문을 받고 의욕 넘치게 넣은 인공감미료 덕분에 달다 못해 쓴 붕생이를 만들었고, 못 먹을 거 같으니 소나 주자고 할머니를 설득했지만 할머니는 그 쓴 감자 붕생이를 찬물에 말아 숟가락으로 훌훌 떠서 국물까지 다 드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버리는 게 아까워서 보다는 손녀의 정성을 소한테 주고 싶지는 않으셨던 것은 아닐까...

 


매미가 정신없이 울기 시작하는 더움과 함께 감자를 캐는 날이 돌아오고, 그러면 우리 집은 한 명의 열외자도 없이 온 식구가 감자 수확을 하러 밭으로 갔다.  

이랑을 덮고 있던 뜨끈한 비닐을 걷어내면 후끈한 김이 오르고, 땅속에 숨어 있던 땅거미랑 땅강아지랑 개미들이 도망가느라 바쁜 광경도 보게 되고, 감자 싹을 힘주어 쑥 뽑으면 성질 급한 녀석들은 감자 싹에 딸려 올라와 모습을 보이고, 수줍음이 많은 녀석들은 끝까지 땅속에 꽁꽁 숨어 있어 호미질로 꺼내 주어야 하는데 의욕만 앞서고 농사 기술이 부족했던 나는 너무 많은 감자를 호미로 찍어 상처가 나게 했다. 상처가  감자들은 저장 능력이 떨어져 장마철이 되면 지독한 똥쿤내를 내며 썩기 시작하는데 그 때문에 여름 내내 대문간 옆 헛간에서는 감자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 엄마는 그 감자들을 도랑으로 몽땅 싣고 가 키가 높은 고무 다라에 넣어 비닐을 덮고 푹 썩힌 뒤 껍질과 불순물들을 걸러내 바닥에 가라앉는 감자 전분을 얻어내는 작업을 하셨는데, 여름방학 때마다 오전 오후 시간을 정확하게 맞춰 그 똥냄새나는 감자전분을 걸러주고 물을 갈아줘야 하는 일은 정말 방학 일기 쓰는 것만큼 귀찮고 싫었었다.


"야나 감자 붕쉐이 먹으러 온나."


할머니는 오늘도 포실포실한 감자를 숟가락으로 뚝뚝 떠서 후후 불며 맛있게 드신다. 점점 망가지는 잇몸 때문에 밥보다는 국시를, 국시보단 이렇게 감자나 두유 드시는 것을 점점 더 좋아하시고 나중에 또 쓰게 될 얘깃거리겠지만 나는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요구르트랑 베지밀을 참 많아 사다 날랐었다.         


꽃이 가득 핀 감자밭을 보고 사진을 찍어보았다. 어린 시절 노동의 현장이라기보다는 온 식구 보물 찾기를 하러 간 것 같았던 감자 캐던 날. 지루해진 동생들과 내가 발견한 두더지 땅굴을 들추던 일, 엄청나게 큰 황소개구리를 만나 엉덩방아를 찧으며 놀랐던 일, 그 개구리 뒷다리와 가재를 구워 먹었던 일도 생각이 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정말 내 삶에 손에 꼽힐만한 체질에 맞는 일인 감자 캐는 제주를 발견했다는 것과 해마다 감자 캐는 실력이 좋아지고 있는 나라는 것이다. 이제 다음 달이면 만나게 될 뜨거운 감자밭이 벌써부터 너무너무 기대가 된다.


"야나 니 감자 붕쉐이 먹을래?"


글을 쓰는 이 밤. 마치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올해도 감자를 캐면 할머니의 요리 법대로 꼭 감자 붕생이를 만들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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