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의 간절했던 소원

by 별바라기

등산을 마치고 식사를 하러 간 식당에서 반가운 잡곡들을 보게 되었다. 거의 다 내가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 농사를 짓던 곡물들이었고, 지금까지도 밥에 얹어 먹는 녀석들도 보여서 반가운 맘에 사장님께 사진을 한 장 찍어도 괜찮겠냐고 청하니, 강원도 홍천에서 데리고 온 녀석들이라며 자긍심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잡곡 홍보를 하셨다. 나는 내 말투가 경기도민 같기를 바라면서 빙그레 웃기만 했다.


우리 아버지는 조밥을 즐겨 드시지 않으셨다. 나도 물론 애정 하진 않는다. 어린 시절의 나는 조밥을 먹을 때 그 작은 조 알갱이가 입안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싫었다. 그리고 우리 집이 가난해서 조밥을 먹어야 하는 것 같아 슬펐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배고팠던 어린 시절 쌀이 부족해 찰기 없는 깡 조밥만 드시고 사신적도 있으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래서 당신이 조밥이 싫으셨다고 하셨던 말씀이 너무도 강렬하게 남아 있어 나도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자랐던 것 같다.(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다는)


어린 시절 식사시간마다 아버지랑 할머니는 가끔 티격태격하셨는데 항상 같은 이유는 할머니가 밥을 꼭 몇 숟가락씩 남기셨다. 밥 양이 혹시나 많아 적게 담아 드려도 늘 같은 양을 남기셨는데 아버지는


"어머이 지금은 쌀이 없어 못 먹는 시대도 아니고 다 드세요. 그걸 남기 논다고 누가 더 먹을 것도 아닌데"


그래도 할머니의 습관은 절대 변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할머니의 식사 버릇은 또 있었는데 수저로 삑삑 소리가 날 때까지 밥그릇을 긁으시는 것이었다. 어린날의 나는 그 삑삑거리는 소리가 듣기 거북해 밥 먹다 말고 귀를 틀어막은 적도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시며 "마한년"이라고 하셨고 아버지는


"어머이 바가지에 담아 먹는 밥도 아닌데 그릇을 그리 박박 긁는대요"


나는 그제야 할머니의 습관이 배고픈 시절 몸에 밴 습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시는 귀를 막지 않았다.


할머니한테 최고의 생선은 '고등애'였다. 갈치, 열기, 조기 등 맛있는 생선도 많았지만 할머니는 일 순위가 고등어, 그리고 이 순위가 임연수였다. 해마다 아버지의 생신이 다가오면 꼭 미역 한 타래, 국거리 소고기 한 근, 고등 자반을 한 손 사 오시어

"야나 이거 니 애비 생일날 끓이주라"


주렁주렁 봉다리를 내 손에 쥐어주시며 상에 올리라고 부탁하셨다.

"할머이 내가 살 건데, 이거 살 돈으로 드시고 싶은 거나 사드시지"


"내가 니 애비 생일을 밑 번이나 더 챙기겠나? 암마또 말고 상에 올리라"


'그러게... 할머니는 아들의 생일을 몇 번이나 더 챙겨주고 싶으셨을까?'


요즘 코로나 때문에 큰맘 먹고 가야 하는 친정행에 할머니가 말씀하셨던 "몇 번이나"가 떠오른다. 그러게 나는 부모님의 생신을 몇 번이나 더 챙겨 드리고, 몇 번이나 더 나의 생일날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 더 자주 찾아뵙고, 손잡아 드리고, 안아 드려야 하는데 코로나 핑계로 줄어든 시골행에 조금은 편해진 나, TV 리모컨과 넷플릭스와 더없이 친근해져 놓고,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을 희석하고자 택배 박스 몇 개 보내고 위안 삼는 철부지 같은 나를 본다.


효는 가르치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든이 넘은 노모가 환갑이 넘은 아들의 생일을 챙기고자 왕복 2시간을 아들 몰래 버스를 타시고 장터에 다녀오시던 일을 떠올리며, 어른들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이 말이 정말 참말이라는 것을 가슴으로 느껴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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