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리리 띠리리"
꿈속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꿈을 꾸고 있었다.
"띠리리"
순간 잠이 깨면서 꿈이 아니란 걸 알았다.
나는 농사철을 맞아 새벽부터 들에서 보내시느라 정신없이 주무시는 부모님과 할머니가 잠에서 깨실까 싶어 후다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러면서 시계를 보니 11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농번기 시골은 동이 트기도 전에 일과가 시작이라 11시는 한밤중이나 다름없어서 나는 속으로 올라오는 짜증을 누르며 수화기를 너머 목소리를 들으니 젊은 남자였다.
"거기 ○○○씨 댁입니까?"
"네에?"
이 시간에 낯선 남자가 아빠를 찾는다.
"○○○씨 계시면 통화 좀 할 수 있습니까?"
"주무시고 계신데 어디신가요?"
나는 본인을 밝히지도 않고 계속 아빠를 찾는 이 남자의 전화에 놀람과 짜증이 어우러져 어디냐 물었지만 말투에는 '니가 누군지나 밝히고 빨리 용건이나 말해 '라는 본심을 팍팍 티를 내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어린 사람이 전화를 받았어도 본인을 먼저 밝혀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는 마포경찰서 형사과 형사○○○입니다."
형사의 직업적인 촉으로 내 의중을 눈치챘는지 정중히 말했고, 나는 경찰서와 형사라는 말에 쫄아서 기다리시라 하고 안방 문을 두드렸다.
내가 거실서 통화하는 소리에 잠이 깨신 아버지가 수화기를 건네받고
"여보세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듣고만 계셨다. 엄마와 나는 아버지 등 뒤에서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고 아버지는 통화를 끝내셨다. 그리고 문 닫힌 할머니 방을 눈짓으로만 가리키며 할머니가 들으시면 안 되는 내용인지 안방으로 엄마와 나를 들어가라 손짓하셨다.
"막내 삼촌이 안치실에 있다네 ."
이 무슨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엄마가 시집왔을 때 10살도 되지 않은, 막내 외삼촌보다 더 어렸던 그 시동생의 부고라니...
아빠가 떨리는 손으로 당신의 얼굴을 훔치며 형사에게 들은 얘기를 전하시기를 내일 오전 중으로 경찰서에 들러 삼촌이 맞는지 신원 확인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재로선 지문 인식을 통해 가족 조회를 하느라 이 늦은 시간에 연락을 했다는 설명도 했다 하셨다. 아빠는 서울에 가봐야 알겠지만 며칠이 걸릴 수도 있으니 할머니랑 집을 잘 부탁한다는 것과 혹여나 할머니가 충격받아 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 더 큰일 날 수 있으니 아직은 아무 말도 하지 말란 당부를 하시고, 뜬눈으로 새벽을 맞으신 부모님은 서울행 첫 고속버스를 타시려고 동도 트기 전 일찍 집을 나서셨다.
아침상을 차려 할머니랑 밥을 먹는데 귀가 점점 어두워지신 할머니는 어젯밤 일은 못 들으셨는지 부모님이 새벽부터 밭에 가신 줄 아신다.
"할머이 아빠랑 엄마는 외가에 일이 있어 가셨어 며칠 있다 오신대"
나는 고민 끝에 이게 젤 좋은 대답일 거 같아 거짓말을 했다.
서울에 간 엄마는 공중전화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어 할머니의 안부와 집의 근황과 서울의 상황을 대략 전해 주셨고, 금방금방 떨어지는 동전 소리를 들으며 서울은 참 먼 곳이라 생각했다.
부모님이 안치실에서 확인한 사람은 막내 삼촌이 맞았다. 그런데 삼촌의 죽음만큼 어이없었던 것은 '타살 혐의 없음'이라는 수사 결과였다. 그 시절 나는 그런 삼촌이 참 바보 멍충이라 생각했다.
며칠을 두고 저녁마다 같은 시간에 걸려오는 엄마 전화를 듣기만 하는 나를 지켜 보신 할머니는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나를 추궁했지만 나는 차마 당신이 제일 아끼던 그 늦둥이 아들이 할아버지 곁으로 갔다고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집요하게 물으시니 나는 외가에 누가 돌아가신 거 같다고 또 거짓말을 했다.
장례를 마치고 부모님이 돌아오셨고 아빠도 처가에 상이 있었다고 둘러대셨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그때, 할머니만 계신 집에 불쑥 들른 당숙 아저씨의 입을 통해 막내 삼촌의 죽음이 전해졌고, 나는 그날 할머니가 아빠를 격하게 원망하는 소리와 할머니의 눈물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할아버지 장례식에서도, 뉴스까지 보도된 막내딸의 교통사고 사망 소식에도 울지 않으셨던 할머니가 그렇게 조용히 긴 시간을 우시는 것을 지켜보는 건 나에게도 슬픈 일이었다.
야속한 세월 속에 할머니는 6남매 중 3남매를 할아버지 곁으로 먼저 보내셨는데, 나는 그들과의 추억을 회상할 시간도, 죽음을 애도할 시간도 없이 할머니가 극한 슬픔에 혹시나 당신의 삶을 놓아 버리시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할머니 눈치만 살펴야 했다. 그런데 훗날 돌아보니 떠나간 삼촌을 향해 바보 멍충이라 했던 것이 두고두고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 속에 가장 가여운 이는 우리 아버지셨다. 당신과 아내와 함께 시집 장가보낸 다섯의 동생들 중 못다 피고 시든 세 동생들의 마지막 길을 손수 배웅해야만 했던 아버지의 슬픔, 맏아들이란 굴레에 갇혀 격하게 책임만 부여된 인생의 무게가 너무 가혹했음을, 너무 잔인한 일이었음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바로 어제일 처럼 생각나고 소름 돋는 것이 당숙 아저씨가 다녀가시기 전 할머니가 나에게
"야야 희한도 하지 어젯밤에 내 꿈에 느 막내 삼촌이 장가가는 거 맨치로 가담마이를 쫙 빼 입고 어딜 간다고 인사하러 왔드라. 가가 어디 좋은데 취직될라 나부다."
아마도 삼촌은 엄마한테 꿈에서나마 인사를 하고 떠나셨나 보다.
삼촌이 당신의 삶을 져버렸던 그때 우리 집 마당엔 할머니의 피눈물 같은 빨간 장미 꽃잎이 우수수 떨어졌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타들어가던 시커먼 가슴처럼 시커먼 색으로 말라가던 꽃잎을 빗자루로 쓸어 버렸던 어린날의 내가 떠오른다. 그때의 삼촌보다 나이가 더 들은 지금의 내가 아파트 담벼락에 핀 장미를 보면서 예쁘다는 생각과 함께 그때의 슬픈 기억도 떠올라 순간 울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