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의 세상의 주인이었다
제가 어린 시절, 고추장은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저희 시골집은 밀양에 있었고, 할머니를 뵙고 돌아오는 길이면 고추장과 된장도 함께 오곤 했습니다. 이 기억은 제가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40년 전이니까요. 시간이 지나도 강렬했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걸, 저는 그때 배웠습니다. 일곱 살 때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요즘 저는 자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생각하게 됩니다. 제 둘째 아이가 올해 다섯 살입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가끔 생각합니다. '나는 아이에게 나쁜 기억을 심어주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고민이 자주 떠오릅니다.
자, 이제 저의 일곱 살쯤 기억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는 두 명의 누나가 있습니다. 큰누나는 저보다 여섯 살이 많고, 둘째 누나는 두 살 차이입니다. 첫째 누나는 장녀라는 이유로 늘 모범을 보여야 했고, 그래서 혼나는 일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13살이면 아직 어린아이인데, 그 나이에 책임을 짊어지는 게 얼마나 무거웠을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더 어렸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하셔서 우리 삼 남매는 아버지와 함께 자랐습니다.
그날도 늦은 저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신 시간쯤이었습니다. 식탁 위에는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고추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누나가 실수로 그 고추장이 담긴 유리병을 떨어뜨렸습니다. 유리병은 깨졌고, 유리 조각이 누나 발에 박혔습니다. 피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누나의 다친 발보다는 다른 걱정이 더 앞섰습니다. 아버지가 화를 내실 게 분명했으니까요.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누나를 혼내셨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게 어떤 고추장인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마음속 깊이 서운함을 느꼈습니다. 왜 아버지는 누나의 피보다 고추장을 더 걱정하시는 걸까? 그때 그 고추장이 아버지에게 정말로 그렇게 중요했던 걸까요? 아니면 할머니에게 받아온 귀한 물건이어서 그랬던 걸까요?
어린 제 눈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식의 상처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순간 이후에도 누나에게 사과하지 않으셨습니다. 누나를 위로하거나 다독여주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 누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불안한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그 순간이 저에게는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그 기억은 시간이 흘러 제가 성인이 되고, 부모가 된 지금도 저를 따라다닙니다. 아이들이 실수하거나 잘못을 저지를 때, 저는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제 안에 있는 어린 저의 기억이 제 발목을 잡습니다. 그때의 내가 느꼈던 불안함과 원망이 떠오르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그런 기억을 심어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유리병에 든 고추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기억은 저에게 고추장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감정까지 함께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저는 아버지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 그때는 정말 잘못하셨어요. 누나는 정말 많이 아팠을 거예요. 그리고 그때 우리도 많이 불안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을 그때는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한동안 혼자 중얼거리며 마음속에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때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들이었어요. 아버지, 그때는 당신이 우리의 세상이었어요. 그 세상에서 저는 불안했고, 누나는 다쳤고, 다른 누나도 마음이 아팠을 거예요." 이것은 저의 독백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직접 하지 못한, 그리고 아버지도 기억하지 못했던 말들입니다. 하지만 그 말들은 여전히 저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시절의 아버지, 그리고 지금의 나. 이렇게 우리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