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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ㅡ Dec 06. 2024

사직, 해지지 않는 마음

- 재직 15년, 더하기 사직 3년 -


직장에서 유난히도 고마웠던 친구의 결혼식.


또각또각. 직장에서 신었던 구두를 꺼내 신었다. 갓 일을 시작했을 ,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에서 엄마를 데려다주는 길에 당신이 사준 신발. 부드러운 격려와 단단한 응원이 농밀하게 들어찬 하얀 큐빅을 단 검은 구두. 깜깜히, 소란스레 불편했다.


직장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입었던 옷도 꺼냈다. 사직을 하며 겨우 남겨두었던 검은 정장. 유별나게 그곳에서 숨 쉬는 일이 어려웠던 것은 몸을 옥죄는 이 옷 때문이었을까. 불편했고 불안했다.

 



사직을 한 지 3년이 지났다. 15년간 한결같이 공포스러웠던 곳, 유쾌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오지 못했다. 그 시절을 담은 옷을 입고 구두를 신은 것만으로도 기묘한 두려움이 걸음걸음이 려들었다.


이런 것들은 유행을 타지도 않고 지도 않는다. 구두도, 옷도 버릴 때가 되지 않았나. 이제는 그래도 되는 때가 온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전해줄 편지를 써두길 잘했다. 편지봉투를 손에 움켜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



"요즘 뭐해요? 그만뒀다면서?"

사직을 하고 나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 답을 뭐라고 해야 할까. 하루종일 무언가를 하고는 있는데 당신 맘에 들만한 대답이 없어서 어쩌지. "백수지요."라고 하면 "팔자 좋네. 남편이 힘들겠어. 애들까지.". 


육아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직장을 다니는 이 훨씬 낫다고 하던 이들도 "아이들 키우죠."라고 내가 답하면 "일은 안 해요?"라고 되묻고. 누군가가 "그림 그리는 거 같던데?"라고 하면 "그거 해서 얼마 벌어요?", "나 좀 그려줘.", "하루종일 그림만 그리는 거예요?" 이 셋 중에 답이 돌아오니, 그 질문들이 어려워 말없이 그만 웃고 만다.


내가 지냈던 직업군에서 나처럼 아무런 계획 없이 직장을 그만두는 사례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그러니 과연 궁금하고 신기하여 물어보는 일. 그저 웃었다. 그럼 상대방도 웃고 마니까. 




돌아오는 , 소나기가 사납게 내린다. 발이 아파 한 걸음 내딛기가 힘들어 구두 한쪽을 벗겨보니 발가락 마디 위마다 살이 까져 진물이 배어 나오고 어느 발가락 귀퉁이엔 피가 나고 있었다. 집까지 얼마 남지 않는 거리, 남은 구두를 마저 벗어 한 손에 들고 돌아왔다.


오랜만에 는 비 밟는 거리. 오랜만에 예전과 같은 모양새로 꾸미고 예전과 같은 미소를 새기며 보낸 하루. 신발을 벗어버린 김에 미소가면도 벗어버렸다. 아무도 없으니까. 그래도 되지 않나.


버려야지. 이제 새 구두를 한 켤레 사두어야지. 새 옷도 한 벌 사야겠다. 신으면서, 입으면서 불편해지고 생채기가 나는 것들에 부러 맞추어야 할 이유가 있나. 새것들로 날 만져서 새로운 날들을 만들어 보아야지. 그런 생각만 하고 싶지만, 비가 괴괴내린.



런 날은 마음껏 슬퍼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빗방울얼기설기 못난 모양새로 얼굴을 침범하고, 쌀쌀맞은 바람이 토실토실 부은 눈을 신명나게 잠재워주 날. 빗소리에 엉엉 소리를 내어도 알아들을 수 없으며, 가엾은 우산 뒤편숨어 헝클어진 얼굴을 감춰내기도 좋은 날. 까무룩하게 괜찮아서 괜찮지가 않은 날.


이토록 구질구질한 날은 슬픔을 한껏 울창하게도,  달래주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올해 내내 부은 눈이 가라앉지 못하고 있는 도, 손톱이 뜯기고 뜯겨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도, 산책을 하고 아이들이 있는 집에 들어가기가 두려워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일이나 무심한 척 악착스레 애쓰고 있는 나마저. 나는 잘 알고 있다.



살다 보면 런 때가 있는 거지. 오늘처럼 발가락이 다 망그러지는 날도 있는 거야. 빗물에 불고 상처 난 발에 연고를 듬뿍 얹었다.


한참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다 나으면 새 구두를 사러 으로 나가봐야겠다고. 언젠가 고속터미널에서 설렘과 바꾸어 소박한 구두 한 켤레처럼, 그것에 몽글몽글마음을 호사스럽게 담아 근사한 일을 시작해 보겠다고. 삶의 반대편으로 향하는 마음을 겨우 붙잡아 달랬다. 


비가 그쳤다. 겨울이야. 괜찮은 겨울을 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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