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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중담 Jan 25. 2024

이제야 알겠다!

이제현 <구름과 비단처럼 아름다운 집>

내가 가보니, 향기로운 붉은 연꽃과 푸른 연잎 그림자가 끝없이 펼쳐진 가운데 바람과 이슬이 흩날리고 안개와 물결이 흔들렸다. 명불허전이라 하겠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용산의 산봉우리들이 푸른빛을 밀고 당기면서 처마 아래로 모여드는데 날이 밝고 어두움에 따라 매번 그 모습이 달라졌다. 앞서 말한 밥 짓는 연기가 오르는 민가의 모습을 앉아서 볼 수 있고, 짐을 이고 지고 가는 사람, 말을 타거나 걸어가는 사람, 달려가거나 멈추어 있는 사람, 뒤를 돌아보거나 누군가를 부르는 사람, 친구를 만나서 선 채로 이야기하는 사람, 어른을 만나서 달려가 인사하는 사람 모두가 모습을 감출 수 없으니 바라보면 즐거웠다...빼어난 산수의 풍경이 반드시 멀고 외진 곳에 있는 것은 아니며, 조정과 시장에 있는 사람들이 늘 보면서 있는 줄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그렇지 않다면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함부로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은 것 아니겠는가(주 1)?



이제현 초상 /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이 문장은 고려시대 말, 원의 간섭기 100여 년의 역사를 기록했던 이제현의 것입니다.

목은 이색의 스승이기도 한 이제현은 한유와 사마천에 버금가는 문장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글은 권렴이 개성 남쪽 숭교리 못가에 지은 '운금루'라는 정자에 붙인 기문(주 2)입니다. 이 글에서 그는 조정과 시장에서 명예와 이익만을 다투면서 사는 사람들이 놓치고 살아가는 일상의 소중함을 빼어난 문장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평범한 연못과 산봉우리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움, 밥 짓는 연기로 상징되는 마을의 평온함, 온갖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예전 문화유산 답사를 다닐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으면서 내내 마주쳤던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 말은 '배롱나무'였습니다. 다른 나무들도 많은데 왜 하필 배롱나무일까? 무튼 교수님은 배롱나무를 무척이나 좋아하셨습니다. 괴테가 그의 애제자였던 에커만에게 말했듯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우기 마련입니다. 저 역시 교수님에게 매료되어 있던 터라 배롱나무에 대한 로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여름이라 배롱나무의 꽃이 만개한 모습을 가는 곳마다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명옥헌'에서 보았던 배롱나무 숲은 제 평생 잊지 못할 황홀한 아름다움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담양 명옥헌


그런데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 한쪽에 죽 늘어선 것이 바로 배롱나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던 배롱나무를, 저는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무언가를 좇아 너무 바쁘게 살아갑니다. 때로는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지위일 수도, 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중한 무언가를 놓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산과 강 같은 자연일 수도 있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요즘처럼 사람이 소중하게 느껴진 적이 없을 만큼 관계의 충만함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비록 온라인으로 만나는 사람들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기쁨과 감사, 그리고 설렘으로 가득한 것을 느낍니다.

모두가 저보다 더 잘 되기를,

상처받은 마음이 위로받고 힘을 얻기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의지가 나날이 굳건해지기를,

한 사람도 지치지 않고 모두 원하는 목표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마주합니다.


그래서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수많은 생명들을 끌어안기를,

청명한 하늘빛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수놓기를,

저마다 밥 짓는 연기가 풍성하게 솟아나기를,

더욱 풍성해져 '타인능해(他人能解)(주 2)'의 정신처럼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를,

저는 간절히 바랍니다.


'빼어난 산수의 풍경이 반드시 멀고 외진 곳에 있는 것은 아니며, 조정과 시장에 있는 사람들이 늘 보면서 있는 줄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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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이규보 외, <한국 산문선 1>, 2018, 민음사

주 2) 기문 : 하나의 건물이 창건되거나 크게 수리를 할 때 그 내력과 뜻을 밝혀두는 글.

주 3) 영조 52년 유이주라는 사람이 지은 '운조루'의 전통으로, 헛간에 뒤주를 놓아두고 배고픈 사람은 누구나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문을 항상 열어 두었다. 헛간에 뒤주를 놓았던 것은 쌀을 가져가는 사람의 불편한 마음까지 헤아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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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하고 있는 브런치북입니다.

⁕ 월, 목 - <문장의 힘!>

⁕ 화, 금 - <거장에게 듣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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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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