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규 <윤이 엄마 제문(祭文)>
이 글은 조선 후기의 문인 이학규(1770~1835)라는 분이 지은 것으로, 죽은 아내를 위해 지은 '제문(祭文)'입니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문학으로 명성을 얻어 정조의 인정을 받았는데,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규장전운』의 편찬사업에 참여할 만큼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김해에 유배되었고, 24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습니다(주 1). 이 글은 김해에서 만난 강 씨와의 만남과 이별, 아내의 가슴 저리게 슬픈 생애의 궤적, 회한과 연민을 담고 있습니다. 아내의 영혼에게 말로 건넨 독백이 훗날 한문으로 정착한 글로, 이 글은 제문 가운데에서도 백미로 손꼽힙니다.
윤이 엄마 진주 강 씨가 도광 원년(1821년) 십일월 초 사흘에 아기를 낳다가 산후풍(産後風)을 맞아서 아흐레 동안 목숨을 부지하다가 세상을 떴다...그의 남편 평창 이학규가 술 한 병에 고기 한 접시를 장만하여 무덤 앞에 차렸다. 그러고서 마치 평소에 권하거니 마시거니 하듯이 혼자 술을 따르고 혼자 고기를 씹어 먹었다. 그런 뒤 강 씨가 누워 있는 무덤을 향하여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오호라! 내 인생이여, 운명 한번 기막히구나. 내가 남녘땅에 머문 지 십오 년이 흘렀을 때 조강지처 정 씨가 옛집에서 세상을 떴소. 생이별을 마치기도 전에 사별이 이어지니 명치끝에 뭔가 걸린 듯, 눈물도 울음도 나지 않았소. 이따금 혀를 끌끌 차며 속으로 따져 보고 손꼽아 봐도 내 운명이 이렇게 크게 어그러질 줄 미처 몰랐소. (중략)
정축년 겨울에 이웃집 노파를 만났더니 말합디다. “이웃 마을에 혼자 사는 처녀가 있는데 어려서 가난했으나 열심히 일해 자립했지요. 형제도 하나 없고 친부모도 없지마는 눈길 주는 남자마다 완강하게 거절했지요. 외로운 둘이 만나 산다면 남들 괄시도 막을 테니 한번 운을 떼 보셔요? 말만 하면 허락할 겁니다."
그렇게 자넬 만난 지 이제 오 년이 흘렀구려. 기묘년(1819년) 여름철 어머니께서 자식을 버리시니 천지가 푹 꺼지고 생사가 가이없을 때 상복을 입히고 미음을 먹여 주며 말했소. "효도를 마치려면 상복 입고 제사 올려야 하고요 부모님이 주신 몸을 손상해선 안 되지요." 말인즉 이치에 맞았고, 마음 씀은 애달팠소.
귀한 손님이 찾기도 해 수종꾼에 가마가 들락거리면 차릴 것이 있거나 없거나 청주에 회를 쳐서 내어놓고는 손님이 돌아간 뒤 나를 보고 말했소. “당신은 벼슬을 못하고 벼슬아치가 찾아오기만 하니 좋지 못한 운수에 시달리는 당신이 불쌍해요. 제가 혼자라고 염려하거나 고생한다고 동정하지 말고 어서 빨리 성은을 입어 옛집으로 돌아가셔요.” (중략)
그때 배 속에는 아이가 있어 구부정히 힘겹게 일하더니 호미를 내던지고 한숨을 내쉬는데 나를 보는 낯빛이 전과 퍽 달랐소. 눈자위엔 눈물이 그렁그렁, 머리를 숙이고 귀퉁이로 가길래 우는 이유 캐물으니 “해산할 게 걱정돼요.”라고 했소.
그즈음 나는 우울증이 심해 사찰에 들렀는데 이틀 밤을 묵고 돌아오니 집 안팎에 인기척 하나 없고 밥도 미음도 들지 않은 채 밥그릇 앞에 두고 햇볕을 쪼이다가 들어오는 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낯빛이 환해졌소.
이튿날 새벽 해산하여 딸아이를 낳았는데 몸을 풀고 난 뒤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머리가 아프다 했소...오한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여 입이 돌아가고 다리를 덜덜 떨었소. 약은 효험이 없었고 의원은 할 말을 잃었소. 자네가 죽던 날 혀는 뻣뻣해지고 목소리는 쉬었으나 그래도 내 손을 잡고서 할 말이 있는 듯했소. 말을 꺼내려다 하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떴는데 그러나 울지도 못했으니 내가 더 슬퍼할까 봐 염려해서였소. 포대기에 싸인 애를 돌아보고 간신히 한 번 안아 보고 안아서 바로 젖을 물리고는 슬퍼하고 처참해했소. 그렇게 영결하여 끝내 이 지경이 될 줄 누가 알았겠소...
오호라! 애통함을 어찌 차마 말로 꺼내겠소! 누군들 감정이 없고 누군들 죽지 않겠소!...의지가지없는 외로운 몸이 자네라면 기댈 만하다 여겼지만 배필이 되어 부부이기는 하나 일하기는 여종이었소. 새벽도 없고 낮도 없이 기름과 소금, 장과 술을 장만하여 맛난 것은 내게 주고 쓴 것은 자네가 먹으며 장수하라 축원했소.
전에 자네가 내게 말했소. “태어난 지 돌도 되지 않아서 고약한 병을 앓아 젖을 못 먹고 또 매도 많이 맞았어요. 지금 나이가 들었어도 아이처럼 허약하고 캄캄한 밤이 특히 무서워 겁이 덜컥 나고 의심이 듭니다.” 내가 밤에 외출하여 술독에 빠져 있기라도 하면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모습이 애달프기만 하였소. 저 아래 저승 세계는 숯처럼 새까말 텐데 어둠을 밝힐 등불도 없고 같이 있어 줄 사람도 없겠구려.
인연이 다 끝나지 않았다면 황천에서 다시 보고 정이 아직 남았다면 꿈에라도 자주 찾아오소. 응애응애 우는 갓난아기는 아직도 자네 젖을 물려야 할 텐데 내가 안아서 먹이고 내가 손잡고 걸음마를 떼게 하겠소. 묵정밭도 있고, 초가집과 채소밭도 있으며 남겨 준 옷에 치마와 웃옷, 저고리와 바지도 있으니 그 애가 장성하기를 기다렸다가 수효대로 넘겨 주리다.
내가 성은을 입고 귀향하여 선영에 가게 되면 마땅히 자네를 버리지 않고 관과 함께 길을 떠나겠소. 삼짇날과 추석에는 벌초를 하고 나무를 심을 것이니 길에서 죽어 시신을 한데 버린 것보다 나을 거요. 자네가 이런 줄을 알면 미련 남기거나 돌아보지 마오.
전에 내가 자네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만약 아이를 낳게 되면 이름을 꼭 윤(允)이라 지으리라.” 했으니 자네는 이제 윤이 엄마요. 자네는 글자를 모르니 글을 지어 부르지 않을 거요. ‘윤이 엄마!’라고 부르기만 하면 바로 ‘나 여기 있소!’라고 답을 하오. 혼령이 벌써 떠났다면 다시 올 기약이 없겠지만 아직 가지 않다면 알아차렸을 거요. 오호라! 슬프구려. 내 말 듣고서 알아차렸을 거요(주 2).
주 1) 출처 : 이학규(李學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주 2) 서유구 외, <한국 산문선 8>, 2017,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