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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jiya Sep 28. 2024

재미없는 수술

진단명 변경: 척수 탈출


자발성 두개 내 저압증(뇌척수액 누출, CSF leak) : 뇌척수액이 흐르는 통로인 경막의 파열로 뇌척수액이 누출되어 뇌압이 낮아져 기립성 두통을 주로 하여 어지럼증, 구토, 복시, 눈부심, 이명 등 다양한 신경증상이 생기는 질환


   완치가 아니라는 남편의 생각이 옳았다. 바꿔 말하면 대학병원의 '완치 판정'은 오진이었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남편은 프라이부르크 대학병원의 판독 결과를 토대로 대학병원의 영상의학과 교수님께 구구절절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남편이 굳이 다시 재판독을 요청한 이유는 잘잘못을 따지자는 의도가 아니다. 재검사를 통해 타깃점을 찾아내면 국내 수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독일행을 선택하기까지 그간 남편이 치료방법을 찾기 위해 다닌 병원의 수가 무려 13개였다.


그중 한 척추전문병원 원장님은 새는 위치만 정확히 찾으면 굳이 독일에 갈 필요 없이 내시경을 이용한 최소침습의 방법으로 자신이 충분히 수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자신 있게 말다. 오히려 등을 열어서 하는 독일의 수술법이 미개한 방식이라고 대놓고 까는 그 자신만만함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이 또한 100프로 검증된 방법은 아니지만 기대라도 걸어보기 위해선 우리 입장에서는 정밀검사 기계를 보유한 대학병원에서 완치판정을 거두고 재검사를 해줘야만 했다.






   메일을 보낸 바로 다음 날, 대학병원 신경과에서 지금 바로 올 수 있냐고 연락이 왔다. 남편은 출근길이었지만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차를 돌려 병원으로 향하는 중이라고 나에게 전화로 알려주었다.


 "그래서 차 돌려서 지금 가고 있는 거야? 와... 을도 이런 을이 없네."


마지막 진료 때 남편이 들은 마지막 말은 냉정한 말투"나가 계시라고요."였다. 말인즉슨, 진료실에서 쫓겨나듯 나왔다는 뜻이다. 자기 질환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고, 그러면서도 겁이 많은 남편은 주치의 입장에서는 피곤한 환자였을 것이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신경과 교수님은 당일 호출한 이유에 대한 설명에 앞서 질문을 먼저 하셨다.


 "OOO교수님께 도대체 뭐라고 메일을 보내셨어요?"


이렇게요... 남편의 구구절절하고 비굴하면서도 구질구질한 메일 내용 중 일부다.






   남편의 메일을 확인한 영상의학과 교수님은 본인이 진행한 정밀검사 외에도 그간 남편이 찍은 모든 영상자료를 살펴보신 모양이었다. 그중 지난 6월경에 찍은 MRI상에서 누출지점을 찾아내셨다.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누출 부위를 통해 단순히 척수액만 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척수 신경이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대로 방치하면 언제 몸에 마비가 올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라 신경과에서 바로 남편을 부른 것이다.


처음부터 제대로 판독을 해주지 못해서 쓸데없이 편두통 치료나 받으며 흘려보낸 시간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그럼에도 남편이 재판독을 요청한 OOO교수님 덕분에 누출위치를 찾아낸 건 감사한 일이었다.


사실 나는 재판독이 자신 혹은 동료의 판단을 번복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 크게 아니,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회신이 없어도 남편이 상처받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교수님은 환자의 간절함을 외면하지 않고, 연민을 가져주신 것 같다.


나는 항상 염려가 지나치다고 남편을 구박했던 게 미안해졌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기다려 보자고 한 건 결국 내 몸이 아니라서 간절하지 않았던 건가 싶었다.






   진단명이 바뀌었다. '척수탈출(cord herniation)'. 수술을 요하는 긴급한 상황이어서 신경과 교수님은 동원 신경외과로 진료를 연계해 주셨다. 우리는 기대했다.


 "그럼 이 병원에서 수술받을 수도 있겠네?" 


사람 마음은 간사하다. 독일을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을 땐 가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안 가도 될 것 같은 희망이 생기니, 먼 타국에서 수술받는 일이 엄청나게 번거로운 일처럼 생각되니 말이다.


 "그래, 독일은 여행으로나 가자, 우리."


그러나 발병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듯 순조롭지 않았다. 신경외과 교수는 본인에게 수술받으려면 2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면서 '요양급여의뢰서'를 써주었다. 



Assessment
T2-3 ventral herniation 의심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상기소견으로 진료보신 분으로 진료 의뢰드립니다. 감사합니다.

Plan>
수술을 시도해 볼 수 있기는 하지만 증상이 생겼던 시점에 없던 병변이 발견되었다고 이 병변이 문제라고 보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병변이 없고 증상이 계속 악화된다면 exploration의 여지는 있습니다.
수술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수술 이후 양 하지 저리고 시림, 심하면 양 하지 마비 위험도 있습니다.

타 대학 추천드립니다.
내시경 수술은 불가합니다.

현재 비종양 환자는 수술 대기가 2년 정도입니다.
중간에 악화되더라도 마취 인력이 없어 수술이 불가해서 전원해야 합니다.






   '병변'이란 단어가 반복되는 두 문장은 여러 차례 읽어도 난해했다. 과도한 띄어쓰기도 참 묘했다. 게다가 '내시경 수술은 불가합니다.'라는 문구는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유일하게 수술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주었던 척추전문병원 원장이 시도하려던 방법이 내시경 수술이었는데, 상급종합병원의 의견이 저리 단호하게 불가하다고 하니 부담이 된다고 했다. 


이 병은 치료가 산 넘어 산이다. 뭐 하나 스무스하게 진행되는 것이 없다. 휴우...


추후에 우연한 경로로 듣게 되었다. 신경외과 교수들에게 이 수술은 '재미없는 수술'이라고 한다. 재미가 없다니? 의사가 아닌 나로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그 행간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커리어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혹은 '해봐야 보람이 없는'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 싶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일들이 있다. 대놓고 격무라서 누구나 고생한다고 인정하는 업무가 있는 반면 은근히 신경은 쓰이면서도 티가 별로 안 나는 일들. 실수하면 티가 확 나는데 정작 잘하면 그저 평타인 업무. 신경외과 의사들에게 남편의 병은 그런 업무 같은 것일까? (그저 나의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럼 국내 어디에서 이 '재미없는' 수술을 해줄까?

우리의 터널은 한 줄기 빛이 보여 따라가 보아도 좀처럼 출구가 시원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금씩 밝아지고는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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