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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기쁨 Aug 14. 2023

나의 흰머리

변화를 수긍하는 법을 배웁니다


남편과 마트에 갔다. 몇 가지 식재료를 카트에 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거트를 사기 위해 유제품 코너를 들렀다. 아이들은 그 많은 요거트 중에 단 한 가지 브랜드만 먹는데 맛있는 건 누구나 다 아는지 그것이 간혹 품절이 되곤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들여다보았더니 다행히 여러 통이 쌓여있었다. 기분 좋게 두 팩을 카트에 넣고 돌아서는데 맞은편에서 타 브랜드의 판촉행사를 하던 판매원이 시식하라며 요거트 한 병을 건넸다.

이미 아이들이 원하는 제품을 장바구니에 담았고, 다른 제품을 구입할 마음이 없어서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는데 굳이 안 사도 되니 가져가라고 챙겨주신다. 좀 미안하기도 하지만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인상이 좋고 매사에 적극적일 것 같은 그 판매원이 갑자기 바짝 다가서더니 내 머리카락을 살짝 가리키면서 물었다.


"엄청 어려 보이는데, 왜 이렇게 머리가 하얘요?"

방심할 틈조차 없이 훅 치고 들어온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웃음으로 대답해 드렸다.

"아, 제가 보기보다 그렇게 어리지는 않아요, 하하."




50대 중반이니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내 주변의 친구들과 또래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흰머리 하나 없이 나타나서 "야, 너는 머리가 아직 까맣네~"하고 놀랄라 치면 어김없이 "아냐, 염색했지, 나 원래는 흰머리 가득이야~"하고 대답들을 한다.


나는 1년에 한두 번 정도 염색을 한다. 흰머리를 완벽하게 가리려면 짧게는 보름마다 미용실을 찾아야 한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그 정도의 열심이 있지 않아서 흰머리를 도저히 그냥 두고 보지 못할 지경이 되면 그제야 한 번씩 염색을 한다. 가장 최근에 염색을 한 것이 지난해 말이니 아마 지금이 염색 없이 지낸 최장 기간 기록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상태로 사람들을 만날 때 반응은 두 가지이다.

먼저는 아까의 그 판매원처럼 얼굴과 어울리지 않으니 염색을 얼른 하라는 반응이다. 나는 종종 얼굴이 동안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아마 우리 친정 엄마를 닮아서 일 것이다. 얼굴이 주는 이미지와 머리카락의 부조화가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까, 내가 이상하게 보이는 걸까.. 소심해져서 염색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게 만든다.


또 하나의 반응은 자연스럽고 보기에 좋다는 반응이다. 머리가 하얗게 잘 센 모습이 때로는 참 멋지게 보이니 그대로 유지해 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우리 아버지를 닮아서이다. 우리 아버지는 이른 때인 40대 때부터 숱이 많은 머리가 온통 하얀색이었다. 동안인 엄마와 막내인 나와 외출을 하면 며느리와 손녀냐는 소리를 듣는 일도 있어서 온 가족이 족보 꼬이게 하지 말고 염색을 하시라 해도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흰머리는 지금 생각해도 참 멋지고 근사했다. 주변에서도 새 하얀 머리카락이 멋진 은발의 신사라 칭찬을 받으시니 아버지에게는 염색을 할 이유가 전혀 없으셨던 거다.


그렇게 두 분의 유전자가 나를 흰머리 가득한 동안으로 나이 들게 했고 염색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갈등하게 만든다.




염색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지금 안 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귀차니즘 때문이지 뭔가 큰 뜻이 있어서는 아니다. 참을성이 부족해서인지 나는 미용실에서 머리에 뭔가를 뒤집어쓰고 기다리는 시간이 힘들어 차일피일 미루면서 펌이 풀어진 머리 그대로, 염색 물감이 다 빠지고 흰머리가 드러난 채로 그대로 있다.

그렇게 계속해서 더 진해지는 흰머리들을 매일 마주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나의 이 흰머리가 친근해지기 시작했다. 알고 보면 이것이 부인할 수 없는 나의 일부인데 자꾸 덮어버려야 할 치부와 같이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하루는 전혀 화장기 없는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기미가 약간 끼어 있고 잔잔한 주름이 생기려는 얼굴에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드러난 머리까지... 얼른 화장과 염색으로 덮어버리기에 급급했던 실제의 내 모습을 처음으로 찬찬히 오래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내가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 아무리 부인하고 포장하려 해도 내 몸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안에서 나의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정직하게 지켜보고는 것이 어떨까.. 그 경험이 나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뭔가 더 특별하고 새로운 것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변화는, 특히 나이가 먹어가면서 일어난 노화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일까... 물론 젊었을 때보다 활동적이지도 못하고, 여러 가지 신체적인, 지적인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


성경의 전도서 말씀이 떠오른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전도서 3:11)


나무들은 봄이면 파릇한 새싹을 내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싱싱하고 푸른 이파리들이 서로 빽빽하게 부대끼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이면 노랗고 빨간 잎사귀로 물들어 장관을 이루고, 겨울이면 봄을 준비하기 위해 모든 것은 다 떨어낸 자리에 하얀 눈을 소복이 받쳐 들고 고즈넉함을 선사한다.

때를 따라 각양의 모습으로 나무들은 변화를 마주하지만 그 어느 모습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  

나무들도 그러한데, 사람들은 더욱 아름답지 않을까... 아니 아름다워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나의 50대가 사라져 가는 젊음을 붙들지 못해 슬퍼하기보다 이때에야 비로소 열매 맺을 수 있는 아름다움에 눈을 뜨는 경이로 채워지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의 변화에 마음을 열고 그 변화가 가져오는 삶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즉 변화를 수긍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요즘 '수긍'이라는 단어를 자주 생각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를 둘러싼 변화와 타인의 말, 감정을 수긍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좁은 나의 삶의 영역을 탈피해 나와 드 넓은 세계로 발을 내딛게 해 주기 때문이다.

늘어가는 흰머리를 통해서도 변화에 대한 수긍을 배우고 다가오는 날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니... 세상에 버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나는 당분간 나의 흰머리를 좀 더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아직은 흰머리카락이 온 머리를 다 덮은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점점 늘어나 우리 아버지처럼 온 머리가 다 하얗게 세게 되었을 그때,  나는 아버지가 주변의 압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의 흰머리에 자부심을 가지셨던 것처럼 수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에 대한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photo by Naver blog


#흰머리#수긍#변화#때를따라아름답게#아름다움#자부심#전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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