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맺지 않던 나무
모처럼 아빠가 집에 있던 날, 아빠는 창고에서 녹이 쓴 톱을 들고 이층 베란다로 향했다. 은행나무 가지는 이층 집을 넘어서 웃자라 있었다. 몸통은 예닐곱 아이의 한아름 밖에 되지 않았는데 키는 4미터가 넘어 보였다. 아빠는 철제 난간에 몸을 지탱하고 톱으로 나무를 잘랐다. 빠르게 오가는 팔과 다르게 살아있는 나뭇가지는 쉽게 잘리지 않았다. 한 시간을 낑낑대다가 간신히 가지 하나를 잘랐다. 반쯤 노랗고 반쯤 파란 이파리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은행잎이 떨어져 폭신폭신한 나무 밑에서 우리는 벽돌을 가루로 빻고 바닥에 소복한 은행잎을 헤치고 흙을 쇠숟가락으로 긁었다. 이가 빠진 사기그릇에 흙을 담고 벽돌가루를 뿌려서 밥을 지었다. 은행잎을 빻아 반찬을 만들었다. 분꽃으로 나물무침도 만들었다. 노란 은행잎으로 쌈을 만들고 동생 한 숟갈, 나 한 숟갈 나눠 먹는 척을 했다. 밥을 짓는 시늉을 하며 엄마가 부르기를 기다렸다.
아홉 살 때 이사 온 이층 집 마당은 작았다. 아빠가 얻어온 꿩 한 마리가 은행나무를 지지하고 친 그물 우리에서 시끄럽게 울어댔다. 아빠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잡아먹으라고 준 꿩은 배추 이파리나 시래기를 먹고 자꾸자꾸 커졌다. 아무도 잡을 수 없었던 꿩은 그물 안에서 날개를 펴고 푸드덕거렸다. 부리로 나무를 쪼을 때마다 노란 은행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졌다. 동생과 나는 무섭고 신기한 이 동물을 나뭇가지로 찔러보다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화려한 꼬리 깃털,붉은 눈 주변 반지르르한 청록색의 목덜미, 윤기가 나는 몸통. 이 동물은 우리가 밥을 짓을 때 우리를 쳐다보다가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무는 위로만 길게 길게 자랐다. 일 년에 한 번 아빠는 가지치기를 하고 나무가 더 크게 자라는 것을 막았다. 장끼가 소리 내 우는 것처럼, 은행나무는 꽃을 피워도 열매를 맺지 않았다.
엄마가 분홍색 바가지에 시든 열무 이파리를 담아왔다. 그리고는 장끼 우리의 그물을 살짝 걷었다. 멀찍이 열무 이파리를 던져주고는 손을 털며, 우리에게 들어가자고 소리쳤다. 한발 물러났던 장끼가 고개를 주억이며 열무 이파리를 쪼았다. 지는 해가 노란 은행잎 사이로 스며들어 주홍빛깔로 빛나고 어둠이 지붕에 걸터앉았다. 동생의 손을 잡고 줄기를 쪼아 먹는 장끼를 돌아보며 엄마를 쫓아갔다. 장끼가 꽤액하고 낮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