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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강 Nov 14. 2024

찬장

짜고 단맛에 취해

찬장에는 그릇들이 서너 겹씩 포개져 있었다. 매일 쓰는 그릇은 허리춤 높이에, 잘 안 쓰는 그릇들은 찬장 바닥에. 학이 그려져 있는 포개진 밥공기를 열어보면 금가락지가 반짝거렸다. 누렇고 투박한 반지는 엄지손가락에도 헐거웠다. 손가락에 끼고 빙빙 돌리다가 얼른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다른 포개진 그릇을 뒤적거렸다. 국그릇 사이에 사슬 모양의 은가락지가 들어있었다. 검지에 끼고 부엌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에 비춰보았다. 손가락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반짝 반짝이는 반지를 만지다가 바지 주머니에 쏙 넣었다.     

     

어깨높이 찬장에는 온갖 양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간장 옆에는 흰 설탕봉지가 기대어 서 있고 소주병 안에는 참기름이 들기름이 찰랑거리고, 다시다 봉지가 반쯤 접혀있고 투명봉지에 담긴 참깨가 맛소금이 주저앉아있고, 그 옆에는 마른미역과 마른김이 검은 봉지에 싸여있었다.


나는 엄마 몰래 식기 건조대에서 말라가는 종지 안에 맛소금을 솔솔 뿌리고 참기름을 부어 기름장을 만들었다. 오른손 검지로 기름장을 휘휘 저어 손가락을 쪽 빨아먹었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 찬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기름장에 손가락을 휘휘 젓다가 입으로 가져가길 반복했다. 참기름에 젖은 소금알갱이가 혀끝에서 녹았다. 오른손에서 참기름 냄새가 녹진하게 났다.      


화장실 대야에 물 쏟아지는 소리가 멈추면, 나도 덩달아 멈췄다가 손가락 빨기를 반복했다. 엄마는 걸레를 빨래판에 문질러 빨고 재색 거품을 헹궈내는 중이었다. 나무 마룻바닥이 삐걱이는 소리가 가까워지면 나는 설거짓거리 사이에 종지를 숨기고 몰래 부엌을 빠져나왔다.


현관문을 열고 샐비어 붉은 꽃이 피어있는 화단 앞으로 갔다. 꽃술을 따서 입술 사이에 물고 쪽 빨았다. 달콤한 꿀이 입안으로 퍼졌다.      

매미가 나무줄기에 붙어 날개를 비비고 백일홍은 나비를 부르고, 나는 짜고, 단맛에 취해 현관 계단에 벌렁 드러누웠다. 부엌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오른손의 고소한 냄새를 맡고 또 맡았다. 은반지가 바지 주머니 속을 돌아다녔다.     


저녁 밥상 앞에서 엄마는 은반지가 사라졌다고 수선을 피웠다. 세자매를 보던 아빠의 눈이 나에게서 멈췄다. 아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주머니 속의 은반지를 꺼내 보였다. 아빠는 나를 크게 혼냈다. 치킨을 사줄 때와 다른 아빠의 모습에 겁이 나서 울음이 터졌다. 아빠가 혼내는 모습은 할아버지를 닮아있었다. 잘못했다고 화끈거리는 손바닥을 바지에 비볐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다짐을 받고 방으로 돌아와 이불이 겹겹이 쌓인 이불장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가 고요했다. 반짝이는 반지, 화를 내는 아빠의 눈이 겹쳐 보였다. 은반지가 들어있던 바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이불장 문이 열렸다. 할머니가 내려다보며 이마를 짚어주었다.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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