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간방 식구
붉은 고추들이 몇 날 며칠을 햇볕에 몸을 말렸다. 불투명했던 고추를 뒤집어가며 며칠을 말리면, 붉은색 셀로판지처럼 고추를 통과한 햇살이 붉은 빛으로 바닥에 어른거렸다. 할머니 옆에서 고추를 뒤집다가 손이 매워 엉엉 울다가, 그 손으로 눈물을 닦아 이번에는 눈이 매워 눈물을 멈출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우는 나를 설탕물로 씻겨주던 할머니. 나는 설탕물에 손을 담갔다가 부어오른 손을 빨아먹다가 다시 아려오는 손을 설탕물에 담갔다가를 반복했다.
1층 문간방에는 미영이네가 살았다. 미영이 엄마는 조그만 미용실에서 일했는데 3살 배기 미영이를 혼자 두고 머리를 말러 나갔다가 동네 아줌마에게 보자기를 씌워주고 미영이를 보러 오곤 했다. 점심을 차려주고 다시 미용실로 가서 머리칼을 자르고 파마를 풀러 주고 머리를 하루 종일 감겨주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집에 왔다. 잔걸음으로 파란 대문을 지나 들어오는 미영이 엄마를 우리는 거실창 밖으로 바라보면서 밥을 먹었다.
할머니는 종종 자반고등어 한 마리나 콩나물무침 같은 것들을 미영이네 갔다 주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미영이네와 우리는 식구였다. 윗집 아랫집 식구. 미영이네 아빠가 술에 잔뜩 취해서 들어와 행패를 부리면 다음날 미영이 아빠는 할머니에게 혼이 나곤 했다.
미영이 아빠가 흰 러닝셔츠 차림으로 식칼을 들고, 미영이 엄마를 쫓아 마당으로 들어선 날, 시멘트 마당은 가을 지는 해의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식칼을 든 미영이 아빠의 눈이 번들거렸다. 미영이 엄마는 빌고 빌면서 마당을 빙빙 돌았다. 나는 현관으로 달려 들어가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가 고무 슬리퍼를 신고 미영이 아빠를 나지막이 불렀다. 마당에서 식칼을 들고 선 미영이 아빠는 식칼을 등 뒤로 숨겼다.
우리 자매는 거실 유리창에 매달려 미영이 아빠와 미영이 엄마,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미영이 엄마가 할머니 뒤로 숨고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지는 해 뒤로 구름 그림자가 드리웠다. 할머니가 미영이 아빠를 다독이고 식칼을 주워 들었다.
한숨을 푹푹 쉬는 미영이 아빠 뒤를 미영이 엄마가 따라갔다. 낮잠에서 깬 미영이가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미영이 엄마는 미영이를 안아 들고 문간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을바람이 라일락나무 사이로 불어왔다. 바짝 마른 고추들이 바람에 몸을 뒤집었다.
깜박깜박 문간방에 불이 켜졌다. 달그락달그락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