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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가지 않은 길 Oct 08. 2022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중동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한다. 그리고 아무리 나쁜 상황에서도 즐길 거리가 하나쯤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황량한 사막에서도 그 말이 성립할까?       

              

  필성은 오늘도 숙소 밖 사막으로 나섰다. 틀에 박힌 일과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면,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해가 진 사막은 한낮의 불같은 열기가 누그러지고, 사냥감으로 배를 채운 맹수처럼 점잖게 그를 맞았다. 하늘의 별들이 속삭이듯 반짝이며 말을 건넸다.      

  ‘또 하루를 버텼네요. 모래바람도 잘 이겨냈으니, 스스로를 칭찬해 주세요.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고국의 부인과 아드님께도 이 소식을 전할게요.'     

  ’ 그래, 고마워.‘ 필성이 혼잣말로 답한 뒤 밤하늘을 향해 외쳤다.      

  “폭염아, 물렀거라. 모래바람아, 비켜라! 나는 이겼다! 내가 이겼어!”     

  사막과 하늘이 맞닿은 저 멀리서 아내와 성호의 해맑은 미소가 번지는 듯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3조 사람들이 코가 댓 자나 빠져있었다. 작업 일지 확인 결과 누수 지점 작업조로 밝혀져, 공구 사무실로 불려 가 진절머리 나게 욕을 퍼먹었단다.      

  “공구장 욕질은 아무도 못 말려. 나이는 똥구멍으로 처먹었나. 웬 욕을 그렇게 해대제.”       

  평소 욕을 제일 많이 먹는 방현우가 구시렁거렸다.     

  “노가다 하다 보면 느는 거라곤 욕밖에 더 있나.     

  봉수한이 한 마디 보탰다.     

  “오늘 모래바람 진짜 장난 아니었지. 하필이면 피할 데도 없을 때 그렇게 사나운 놈이 닥칠 게 뭐람. 제대 말년에···흠, 그렇재. 제대 말년에, 배 터지게 모래알 먹고 죽을 뻔했구먼.”       

늘 ‘제대’ 타령을 하는 윤창식은 아직도 콧구멍에서 모래를 후벼내고 있었다.      

  “그래도 캠프 작업 때에 비하면 양반이지.”     

  설경찬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야 피할 데가 있나 가릴 게 있나, 속수무책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려 당할 수밖에. 그때만 했어도 모랫바닥에 얼굴을 댈만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 난리를 치르고 나서는 씻을 물이 있어야 말이지. 온몸이 먼지 감태기가 된 채 원시인처럼 지냈소이다.”     

  설경찬이 진저리를 치며 말을 이었다.     

  “식사 중에 그놈이 지나가고 나면 밥알 반 모래알 반이었소. 밥을 물에 말아 모래를 가라앉혀 살살 건져 먹고 김치는 빨아먹었지. 그래도 입안에서 모래알이 으썩으썩 씹혀. 모래를 하도 씹어서 지금도 배 속에 남아 있을 거요.”      

  “어휴, 한 달 선배가 그냥 선배가 아니구만.”     

  윤창식이 거수경례를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석씨, 이번 금요일에 뭐 할 거유?”      

  방현우가 석한풍에게 물었다.      

  “글쎄, 시내 구경이나 갈까나?”

  석한풍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휴일이면 회사에서 담맘과 다란까지 무료 버스 편을 제공했다. 또한 매월 수당 중 30리얄을 현지에서 지급해 근로자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쁘지 않았다.     

  “나가봤자지 뭐. 술이 있수, 여자가 있수?”     

  “그래도 콧구멍에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낫지.”     

  석한풍은 휴일이면 어김없이 시내 나들이를 하는데, 방현우는 그가 돈 한 푼 쓰는 걸 보지 못했다.     

  “영화감상 안 할라요? 이번 휴일에 문화 영화 상영하는디.”      

  방현우가 비밀리에 돌고 있는 정보로 석한풍을 꾀었다.     

  “문화 영화? 그거 좋재. 제대 전에 함 봐 둬야재.”      

  윤창식이 귀를 쫑긋 세우더니 눈을 반짝였다. 문화 영화란 근로자들 사이에 통하는 은어로 당시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포르노 영화를 의미했다.      

  “나도 함 봐야겠네. 발가벗은 년놈이 별짓을 다 한다며?”     

  필성은 돈이 아까워 첫 상영을 넘겼는데, 보고 온 사람들의 말에 호기심이 당겨 다음 상영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어허, 장사 잘되네. 석씨도 한번 봐봐. 정말 끝내준다니까.”     

  “에이, 헛물만 켜는 거지 뭐. 돈만 깨지고.”     

  석한풍은 시큰둥하게 말했지만, 방현우는 그의 속마음은 돈을 아끼려는 거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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