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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May 02. 2024

빈 그릇에 담긴 메모 한 장

이 동네로 이사를 왔던 8년 전만 해도 우리 동네는 배달기피지역이었다. 집에서 오 분을 걸어가야 작은 편의점이 하나 있고, 그 흔한 치킨 집 하나를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우리 동네는 비로소 배달이 가능한 영역이 되었다. 배달료가 거리에 따라 달라서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배달료를 지불하면 집 앞에 갖다주기는 했다. 코로나가 이 동네를 개화한 셈이다.


그렇게 기피지역이기는 해도, 우리나라 배달문화의 선두주자였던 중국집만큼은 달랐다.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도 오토바이 엔진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달려와 주었다.

그때만 해도 중국집에서는 일회용 검정 그릇이 아닌, 접시 안쪽에 자기네 중국집 이름이 박힌 그릇을 사용하였다. 그 그릇들중국집의 재산이어서 반드시 회수해 가야 했기에, 어둠이 내릴 무렵이면 오토바이가 다시 와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갔다.

빈 그릇을 가지러 온 오토바이의 짐칸에는 배달용 철가방이 아닌, 파란 색 플라스틱 들통이 묶여 있다. 배달원은 동네를 돌며 신문지로 덮어놓은 그릇들, 비닐 봉투에 담은 그릇들을 회수해 갔다. 남아 있던 짜장소스, 홍합 껍데기가 들어 있는 짬뽕 국물, 단무지와 춘장 등 음식물 쓰레기와 그릇은 들통 속에 한데 뒤섞여 오토바이 굉음과 함께 사라져 갔다.


우리 집 현관과 이웃집 현관은 한집처럼 붙어 있다. 이웃집에는 젊은 부부가 세살, 여섯 살인 두 아이와 살았다. 이웃집도 우리처럼 가끔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어느 날, 이웃집 앞에 놓여 있던 빈 그릇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깨끗하게 설거지가 된 그릇들은 뽀득뽀득 물기 없이 투명 비닐 봉투 안에 가지런히 들어 있었고, 그 안에는 과자 한 봉지와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아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수고하세요."


그 날 하루만 그랬던 게 아니다. 그릇 속에 들어 있던 먹을거리는 과자 한 봉지, 음료수 한 병, 사탕 몇 개로 달라도, 단정한 글씨로 고마움의 인사를 적은 메모지 한 장은 꼭 들어 있었다.


그들이라고 회수해 가는 그릇이 쓰레기통과 다름없는 수거용 들통에 던져지리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씻은 그릇, 안 씻은 그릇을 분류해서 가져가는 게 배달원들은 더 어려웠을 거라는 것도 감안했을 테다.

'이 그릇은 설거지를 했으니 다시 하지 마세요.'라는 뜻으로 그렇게 씻어 놓은 것은 아닐 거고, 배달원을 통해 사장님에게 갖다드리라고 과자 봉지, 음료수 병을 놓은 것도 아닐 것이다.

배달원인지 사장님인지 대상을 특정하지 않았을지라도, 한끼 식사를 해결한 데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다. 내 돈 내고 사먹는 것이기는 하지만, 음식을 만들고 가져다준 수고를 기억한다는 마음을 담아서 썼을 것이다.


급식을 하지 않았던 옛날, 도시락에 들어 있던 엄마의 메모 한 장이 오후 수업을 견딜 힘이 되기도 했다.

요즘은 사회적 참사가 있을 때나,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며 메모를 써 붙이기도 한다.

전시회를 관람하고 난 뒤에 소감을 적은 메모지를 붙이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되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일 것처럼 사소한 메모지 한 장이 누군가에게는 꽤 기분좋은 일이 될는지도 모른다. 하루 노동의 피로를 씻어주는 시원한 물 한 잔처럼, 음료수 뚜껑 안에 씌어진 '한 병 더'라는 행운처럼. 메모지 한 장의 무게만큼이나 가벼워서 부담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선물, 마음이 가 닿으면 좋고 가 닿지 않는다고 해도 그리 아쉽지 않은 그런 선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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