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네로 이사를 왔던 8년 전만 해도 우리 동네는 배달기피지역이었다. 집에서 오 분을 걸어가야 작은 편의점이 하나 있고, 그 흔한 치킨 집 하나를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우리 동네는 비로소 배달이 가능한 영역이 되었다. 배달료가 거리에 따라 달라서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배달료를 지불하면 집 앞에 갖다주기는 했다. 코로나가 이 동네를 개화한 셈이다.
그렇게 기피지역이기는 해도, 우리나라 배달문화의 선두주자였던 중국집만큼은 달랐다.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도 오토바이 엔진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달려와 주었다.
그때만 해도 중국집에서는 일회용 검정 그릇이 아닌, 접시 안쪽에 자기네 중국집 이름이 박힌 그릇을 사용하였다. 그 그릇들은 중국집의 재산이어서 반드시 회수해 가야 했기에, 어둠이 내릴 무렵이면 오토바이가 다시 와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갔다.
빈 그릇을 가지러 온 오토바이의 짐칸에는 배달용철가방이 아닌, 파란 색 플라스틱 들통이 묶여 있다. 배달원은 동네를 돌며 신문지로 덮어놓은 그릇들, 비닐 봉투에 담은 그릇들을 회수해 갔다. 남아 있던 짜장소스, 홍합 껍데기가 들어 있는 짬뽕 국물, 단무지와 춘장 등 음식물 쓰레기와 그릇은 들통 속에 한데 뒤섞여 오토바이 굉음과 함께 사라져 갔다.
우리 집 현관과 이웃집 현관은 한집처럼 붙어 있다. 이웃집에는 젊은 부부가 세살, 여섯 살인 두 아이와 살았다. 이웃집도 우리처럼 가끔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어느 날, 이웃집 앞에 놓여 있던 빈 그릇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깨끗하게 설거지가 된 그릇들은 뽀득뽀득 물기 없이 투명 비닐 봉투 안에 가지런히 들어 있었고, 그 안에는 과자 한 봉지와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아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수고하세요."
그 날 하루만 그랬던 게 아니다. 그릇 속에 들어 있던 먹을거리는 과자 한 봉지, 음료수 한 병, 사탕 몇 개로 달라도, 단정한 글씨로 고마움의 인사를 적은 메모지 한 장은 꼭 들어 있었다.
그들이라고 회수해 가는 그릇이 쓰레기통과 다름없는 수거용 들통에 던져지리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씻은 그릇, 안 씻은 그릇을 분류해서 가져가는 게 배달원들은 더 어려웠을 거라는 것도 감안했을 테다.
'이 그릇은 설거지를 했으니 다시 하지 마세요.'라는 뜻으로 그렇게 씻어 놓은 것은 아닐 거고, 배달원을 통해 사장님에게 갖다드리라고 과자 한 봉지, 음료수 한 병을 놓은 것도 아닐 것이다.
배달원인지 사장님인지 대상을 특정하지 않았을지라도, 한끼 식사를 해결한 데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다. 내 돈 내고 사먹는 것이기는 하지만, 음식을 만들고 가져다준 수고를 기억한다는 마음을담아서 썼을 것이다.
급식을 하지 않았던 옛날, 도시락에 들어 있던 엄마의 메모 한 장이 오후 수업을 견딜 힘이 되기도 했다.
요즘은 사회적 참사가 있을 때나,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추모하며 메모를 써 붙이기도 한다.
전시회를 관람하고 난 뒤에 소감을 적은 메모지를 붙이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되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일 것처럼 사소한 메모지 한 장이 누군가에게는 꽤 기분좋은 일이 될는지도 모른다. 하루 노동의 피로를 씻어주는 시원한 물 한 잔처럼, 음료수 뚜껑 안에 씌어진 '한 병 더'라는 행운처럼. 메모지 한 장의 무게만큼이나 가벼워서 부담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선물, 마음이 가 닿으면 좋고 가 닿지 않는다고 해도 그리 아쉽지 않은 그런 선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