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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May 07. 2024

나무에게 물으리라

그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일 수 있으므로

어떤 좋은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반드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내가 그 사람을 꼭 좋아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거나 말거나, 그 사람의 인격이 훌륭하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그 사람이 했던 '어떤 좋은 일'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 어떤 일이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때는 잠깐 스쳐 보는 사진처럼 기억 속에만 남는다. 그러나 그 어떤 일이 나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던 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작게는 '고맙고 은혜로운 일이었어'라여길 테지만, 크게는 '일이 아니었으면 그때 난 죽었을 거야'라고 여길 일일 수도 있다. 

오늘은 죽을 나무를 살린 두 사람 이야기.


한 사람.

그 사람은 원래 식물친화적인 사람이다. 실내든 실외든 꽃 가꾸는 것을 좋아한다. 꽃뿐 아니라 농사도 잘 짓는다. 평생 농사꾼이었던 그의 어머니를 꼭 빼닮은 듯하다.

그는 직장인 어린이집 앞 공원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가 나무를 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직장 곳곳에 나무를 심고 꽃을 심어 가꾸었던 그가 아이들이 자주 오가는 곳에 과실수 한 그루를 더 심은 것뿐이다. 어린 나무는 그의 손길을 받아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한 아이가 놀란 눈으로 뛰어들어와서는 그에게 나무가 부러졌다고 알렸다. 그가 아이를 따라 보니, 작은 가지가 꺾인 게 아니고 가운데 줄기가 뚝 부러져 있었다. 그도 놀라고 따라나갔던 나도 놀랐다. 나반토막이 난 나무의 모습을 보고 마음속에서 이미 나무의 사망을 예감했다.

나무의 부러진 부분을 살펴보던 그는 아이에게 잠시 붙들고 있으라고 하더니 어린이집에 있던 응급처치용 비상약통을 들고 나왔다. 정형외과 의사가 탈골된 뼈를 맞추듯, 조심스럽게 부러진 줄기를 맞추고는 부목을 대고 붕대로 감기 시작했다.

그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그 나무는 죽지 않고 살아나서 그 후 제법 튼실한 나무로 자랐다.

대규모 공원 공사를 하면서 그 나무는 다시 잘려나갔지만 나는 그 나무를 기억한다, 오랫동안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던 모습을.


또 한 사람.

대안학교 설립자인 그는 다방면에 박학다식하다. 지금은 교육 관련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그처럼 여러 학문을 깊이 연구하는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다. 그가 연구하는 교육론은 어느 한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어서 일반적인 교육 이론서로는 찾아보기 어렵다. 스스로 연구하여 정립한 내용들이기에 여타 교육이론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많은 현장의 교사들과 부모가 그의 강의를 들었다. 현장에서 일할 때 나도 각각 다른 주제로 이루어지는 강의와 연수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아쉬웠던 점은 교재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의 강의를 들은 이들은 그가 하루빨리 책을 내기를 바랐다. 교재에 대한 욕구가 빗발치자, 고민하던 그가 교재를 보겠다고 했다. 책 발간을 도와줄 사람들을 모았다. 강의 녹취를 풀어 입력을 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면서 원고를 만들어 갔다. 나도 녹취 풀이 작업을 도우며 책의 발간을 기다렸다.

원고가 얼추 다 되어 간다고 했던 어느 날, 그는 대략 이런 내용을 남기며  발행을 접었다.

"책을 내겠다고 원고를 준비하면서 내가 과연 이 책을 내도 되는지 계속 고민해 왔어요. 나무를 죽여 내 책을 만들 만큼 내 책의 가치가 있는 건지... 그래서 나무에게 직접 물어봤어요. 나무는 대답을 하지 않더군요. 허락는 것 같지 않책은 내지 않기로 했어요."

그가 책을 낸다고 해서, 그가 직접 대화를 했던 그 나무가 목숨을 잃는 건 아니다. 책을 낼 때마다 나무에게 허락을 구한다면 이 세상에 책을 낼 사람은 별로 없을 게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고민과 결정을 존중하며,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나무와 소통을 했을 거라고 믿는다. 워낙 영적인 지혜가 남달라 보였던 사람이므로.


나도 가끔, 그 사람을 흉내 내어 나무에게 묻는다. 내가 꽃을 조금 따도 되겠느냐고, 가지 하나 꺾어도 되겠느냐고, 잎사귀를 타고 올라간 벌레들을 내쫓아도 되겠느냐고, 사람들이 부르는 네 이름은 무엇이냐고. 가끔 답을 듣지만, 훨씬 더 자주 답을 듣지 못한다. 그래도 꾸준히 물으리라, 나무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가 될 수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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