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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Oct 31. 2024

가을 텃밭엔 배추가 주연이지

첫서리가 내리는 상강, 내 인생도 지금 상강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검게 염색합니다. '노티' 나는 옷은 쳐다보지도 않고 딸내미 옷장을 기웃거려 봅니다. 얼굴을 덮은 기미와 눈가의 주름을 가리기 위해 화장품을 두드려 댑니다.

'좀 젊어 보이려나?'

꽃단장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서 봅니다. 그러나 차곡차곡 먹은 나이는 분장과 변장으로 감춰지지가 않습니다. 잘록한 허리의 딸내미가 입던 옷이 펑퍼짐하게 항아리처럼 바뀐 제 체형에 어울릴 리가 없습니다. '에잇.' 화장을 지우고 옷도 입던 걸로 다시 꺼냅니다. 걸로 갈아입으니 몸도 마음도 세상 편합니다!


살아온 세월에 맞는, 먹어 온 나이에 어울리는 옷은 따로 있습니다. 텃밭도 그런가 봅니다. 상강 절기의 텃밭에는 배추와 무, 쪽파, 부추가 자라고 있습니다. 배추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커 갑니다. 서리가 내려야 벌레가 덜 생길 텐데 어지간한 추위에는 겁먹을 벌레들이 아닙니다. "배추가 많이 큰 건 좋았는데 벌레가 더 많이 큰 것 같았다"라는 수인이 글을 보니 벌레들은 아직 아이들의 고소한 배춧잎 맛을 잊지 못하고 있나 봅니다. 지금은 고랑에 널브러진 푸르고 억센 겉잎들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막 퍼질러 앉은 아줌마들 같지만, 서리를 맞으며 속이 옹골차지고 볏단으로 단단히 몸을 묶으면 배추는 단연코 가을 텃밭의 빼어난 주연 배우들이 될 겁니다.


배추가 주연이라면 무는 조연입니다. 그러나 작물을 탐내는 벌레는 오로지 아이들 손끝으로만 잡는지라 벌레들의 공격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무청도 속수무책으로 갉아먹히는 중이지요. 구멍이 숭숭 뚫렸는데, 주연 데뷔를 하고 싶어 마음 급한 무는 자꾸 땅 위로 얼굴을 내밀려하네요. "무가 빼꼼 나왔다. 앞으로 훨씬 열정적으로 키워야겠다." 주연이(아이 이름이 주연이에요^^)의 글을 읽으니, 주연이는 앞으로 더 열정적으로 벌레를 소탕하려나 봅니다.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소매를 걷어부친 주연이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부추가 몇 달째 자라고 있다. 내 바람대로 부추전도 해 먹었다. 진짜 꿀맛이었다. 예전엔 우리 부추가 가장 작은 것 같아서 싫었는데 부추전을 가장 맛있게 먹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부추가 없었더라면 아이들이 부추전 맛을 알지 못했겠지요. 부추는 작지만 꼭 필요한 엑스트라 배우. 예설이가 인생을 살면서도 그렇게 작지만 필요한 사람들을 알아보고 고마워하며 살게 되기를 응원합니다.


그런가 하면 딸내미 옷을 빌려 입고 나오는 저처럼, 가을 텃밭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얼굴들도 있습니다.


잎은 다 시들어 가는데 별로 쓸모도 없어 보이는 열매를 매단 수세미, 지난여름 아이들 손톱에 물을 들여주지도 못하고 잘려나갔으나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봉숭아, 열정 하나만 있으면 지금 죽어도 좋을 것처럼 하늘을 향해 붉은 꽃을 피워 올리는 칸나, 죽어 잘린 몸에 페인트까지 발렸건만 그 틈새를 뚫고 살아난 이름 모를 버섯 같은 것들입니다.


'수세미는 봄에 심은 모종이니 한창 더운 여름에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혼자 붉은 칸나보다 여럿이 함께 있는 국화가 보기 좋은 계절이지.'

가을 텃밭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고 그들을 탓할 일은 아니지만, 때를 잘못 택한 듯한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가을 텃밭에는 겨울을 위한 배추와 무가 어울리듯, 인생의 가을녘에는 한겨울 든든하게 밥상을 지켜줄 사람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칸나처럼 뜨겁게 사랑하고 불살라버리는 열정은 젊어 한때 누려볼 만한 거지, 흰머리가 서리처럼 내려앉은 가을녘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요.


혹여, 제가 그런 철 모르고 때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십 년 전 아이들과 함께 그린 절기 달력에 상강을 '우리도 물들 준비를 할 때'라고 써 놓았는데요, 이제 저는 어떤 색으로 물들어 가야 할까요? 가을 텃밭에서 저는 어떤 작물처럼 살고 있는 걸까요? 서리가 내리고 찬바람이 불고, 마침내 작물을 다 거두어들인 빈 겨울 텃밭이 되면 저는 어떤 마음으로 그 밭을 바라보게 될까요? 내게 주어진 한 생을 때에 맞춰 잘 살았다, 누군가의 밥상을 채워주는 수확을 잘 거두었다, 그렇게 살려면 오늘 이 하루는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요?


첫 서리가 내리는 상강, 제 인생도 지금이 꼭 상강입니다.


봄에 심은 수세미가 뒤늦게 갤쭉한 열매를 맺기는 했습니다만, 예쁘지도 않고 쓸모도 없습니다. 가을은 그들의 때가 아닌 모양입니다.


5학년 아이들 그림에는 5학년 나이다운 단풍색이 들었습니다. 파랗고, 노랗고, 빨갛고, 알록달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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