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뜨기 전에 등교해서 한밤중에야 들어오는 고3 수험생 딸내미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빛이 있어야 색이 보인다는 단순한 사실도 잊게 만드는, 밤낮 없는 입시생의 고단함이 안쓰럽습니다.
해가 짧아지기 전, 아이가 등하굣길에서 빛을 만날 수 있었던 여름날의 배경색은 단연 초록이었습니다. 프러시안 그린, 섀도 그린, 코발트그린 딥, 비리디언, 퍼머넌트 그린, 올리브 그린... 수채화 물감 이름보다 더 분별하기 어렵게, 미묘하게 다른 초록빛이 눈을 들어 보는 곳마다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키가 작든 크든, 나뭇잎이 아기 손톱만큼 작든 쟁반만큼 너부데데하든 관계없이 생긴 대로, 자기 자리에서 열일해 온 엽록소들 덕분입니다.
빛을 한껏 받아들여 살아온 나무에서 초록빛 장막이 걷혀 가면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본연의 색이 드러납니다. 한 해의 성장과 노고를 열매와 씨로 만들어 낸 나무는 내년을 위해 몸을 다시 만들기 시작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남길 것은 남기는 정제의 시기, 자기 본연의 색을 한껏 발산하는 시기가 도래하는 중입니다. 절기도 이슬이 아니라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상강(霜降)으로 접어들었습니다.
황금빛으로 출렁거리던 벼를 베어내 황량해 보일 무렵이면, 길가에 은행나무들이 노란빛을 발산합니다. 나들이를 나갈 때면 아이들은 냄새나는 은행알을 밟을까 봐 요리조리 피해 다니지만, 발 밑 수북하게 떨어진 은행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어르신들도 눈에 띕니다.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옮겨 다니지 못하는 데다 암수가 딴 그루이기까지 한 은행나무는 멸종하지 않고 세대를 거듭해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비롭습니다. 게다가 생존하는 나무들 중 가장 오래된 나무라고 하니, 은행나무 아래에 서 있으면 경외심마저 듭니다.
되돌아보니, 제 생에서 가장 처음으로 감탄했던 나무가 바로 용문사의 은행나무였네요. 예닐곱 살 정도 되었을 때였던 것 같아요. 가족여행으로 가서 처음 보았습니다, 하늘에 펼쳐지고 땅을 가득히 덮었던 노란 세상!
'나무가 이렇게 클 수도 있구나, 나뭇잎이 이렇게 많을 수도 있구나, 나뭇잎 색이 이렇게 샛노랄 수도 있구나.'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재촉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그 후 제가 다닌 학교 교정에서도, 백 년도 더 된 시골 성당 앞마당에서도 황금빛 은행잎들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던 황홀한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은행나무가 노랑으로 물들어 주어 더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저는 일 년 내내 색이 변치 않는 늘 푸른 나무보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갈잎나무들을 더 좋아합니다. 봄이면 연둣빛 새순이 돋고, 한여름에는 어울렁더울렁 초록으로 물결치다가, 가을에는 숨겨 두었던 제 빛을 드러내 보이고, 겨울에는 맨몸으로 버티는 나무들이 피고 지는 인생을 더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세상이 초록빛으로 물들여졌을 때는, 거저 받은 초록이 은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초록이 거두어졌다고 거저 받은 은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거저 받은 것들을 다 걷어내야, 제 본연의 모습을 제 빛깔대로 드러내며 살 수 있는지도 모르지요. 비록 그 빛이 찬란하지도, 황홀하지도 않더라도요. 나뭇잎처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은혜를 손에 쥐고 살다가, 하나씩 떨구어야 하는 시절이 온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다음 해 봄을 위한 준비는 이렇게 시작되는 거니까요. 마찬가지로, 상강에 내린 서리가 눈이 되고 얼음이 된다고 해도 절망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저 겉모습이 달라졌을 뿐, 봄이 되면 서리도, 얼음도 물이 되어 온누리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흐를 테니까요.
[또 하나의 달력 / 전례력]
핼러윈 데이를 앞두고 아이들의 '귀신 놀이'가 한창이다. 핼러윈 데이가 '모든 성인들의 대축일' 전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 생각해 보면 성인과 귀신은 한 끗 차이니, 귀신이라고 해서 무서워할 것도 없다. 서리를 맞는 나뭇잎들이 나무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향하는 11월은 위령성월. 죽음을 묵상하며 죽은 이들과 친교를 나누는 시기다. 부활절만큼이나 전례력과 절기의 의미가 딱딱 맞아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