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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Nov 08. 2024

겨울, 첫 발을 딛다

새 다이어리를 마련하는 입동(立冬)

2025년 새 다이어리를 샀습니다. 오장칠부처럼 들고 다니는 휴대폰에 스마트한 달력 앱이 있지만, 잊지 말아야 할 일정부터 사소한 지출 내역까지 시시콜콜 적어 놓는 다이어리를 사용하는 것은 제게 남아 있는 최후의 아날로그적 습관인지도 모르겠네요.


혹자는 아직 두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 무슨 새해 수첩을 쓰느냐고 하시겠지요. 제가 애용하는 어느 문구회사는 고맙게도 11월부터 내년 12월까지 묶은 다이어리를 제작해서 판답니다. 열네 달이 들어 있는 이런 독특한 다이어리를 사는 사람은 아마도 정해져 있을 겁니다. 몇 달 길게 내다보면서 일해야 하는 사람이거나, 성격이 급한 사람이거나. 그러나 전자든 후자든, 쓰던 수첩을 접고 새 수첩을 사는 마음에는 고단했던 지난 해를 어서 빨리 마무리하고 올해보다는 더 희망찬 새해를 맞고 싶은 바람이 들어 있을 거예요.


실제로 우리가 쓰고 있는 '그레고리우스력'이 상용화하기 전에는 개성 강한 달력들이 꽤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로물루스력'이라는 달력은 11, 12월이 없다는데요, 1년을 304일로 치고 겨울은 아예 달력에서 제외했다고 하네요([절기서당] 214쪽 참고). 이유는 혹독한 추위의 겨울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라고요.  가리고 아웅이지, 달력에 써놓지 않는다고 겨울이, 추위가 오지 않기야 하려구요. 그러니 어차피 맞이할 겨울이라면 첫 발을 내딛는 입동부터 새해 새 봄을 살기 위한 빌드업을 시작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다이어리를 사는 이즈음엔 달력도 서서히 준비합니다. 어린이집 일곱 살 아이들의 취학 준비 교육을 하고 있는 특별활동 교사이기도 한 저는 아이들과도 달력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봄부터 가을까지는 우리 말, 우리 글자 놀이를 하고, 겨울에 접어들 무렵이면 '수와 달력' 과정을 진행합니다.


첫 시간에는 숫자 1부터 10에 깃든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리 전래 말놀이에도 숫자를 말하며 노는 놀이가 있어요. 제가 어릴 적에 많이 부른 노래는 "하나 하면 할머니가 지팡이 짚고 잘잘잘"로 시작되는 '잘잘잘'이었어요. 주로 '쎄쎄쎄'라고 하던 손뼉치기를 하면서 불렀지요.

하나는 뭐니 하나는 해지
둘은 뭐니 둘은 콧구멍
셋은 뭐니 셋은 지게 다리
넷은 뭐니 넷은 밥상 다리
다섯은 뭐니 다섯은 손가락
여섯은 뭐니 여섯은 파리 다리
일곱은 뭐니 일곱은 북두칠성
여덟은 뭐니 여덟은 문어 다리
아홉은 뭐니 아홉은 여우꼬리
열은 뭐니 열은 오징어 다리

그렇지만 제가 수업할 때는 전래 말놀이보다는 발도르프 교육 과정에서 배운 내용을 일부 각색하여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 주고 있어요. 완전성을 의미하는 3, 3을 곱해서 나오는 '아홉 수'처럼 힘든 고갯길을 의미하기도 하는 9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스럽지만, 다행히 아이들도 가위바위보를 할 때 '삼세번' 하고 정월대보름 때 아홉 가지 나물을 먹는다는 걸 알고 있더라고요.

하나는 무얼까 개암나무 열어라 하나는 하늘이지, 언제까지 하나
둘은 무얼까 개암나무 열어라 둘둘은 낮과 밤, 낮과 밤은 둘
셋은 무얼까 개암나무 열어라 셋은 모두 좋은 일들
넷은 무얼까 개암나무 열어라 넷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섯은 무얼까 개암나무 열어라 다섯은 반짝반짝 별
여섯은 무얼까 개암나무 열어라 여섯은 수정 벌집 눈꽃
일곱은 무얼까 개암나무 열어라 일곱은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빛깔 무지개
여덟은 무얼까 개암나무 열어라 여덟은 거미
아홉은 무얼까 개암나무 열어라 아홉은 아홉 고개
열은 무얼까 개암나무 열어라 열은 손가락 열

아이들의 달력은 이듬해 3월부터 만들기 시작합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11월초, 입동부터 새해를 준비하는 저와 비교해 보면 무려 다섯 달이나 차이가 나는 거지요. 그래도 왠지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아이들의 첫 시작은 봄바람이 솔솔 불고 새 순이 올라오는 3월이 제격인 것 같아요. 누가 뭐래도, 아이들의 계절은 봄이잖아요!


봄이 아이들의 절기라면, 겨울의 첫 발을 내딛는 입동은 아이들보다는 어르신들을 기억해야 하는 절기입니다. 실제로 입동에는 마을 어르신들에게 '치계미(雉鷄米)'를 대접하는 세시풍속이 있었다고 하네요. 꿩, 닭, 쌀을 의미하는 치계미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을 골고루 갖춘 속이 든든한 식사를 말하는 거겠지요. 기나긴 겨울을 따뜻하고 외롭지 않게 지내시라는 덕담과 기원이 가득 담긴 한끼 식사가 추위에 약한 어르신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을 겁니다.


새 다이어리에 친지들의 생일과 기념일들을 옮겨 적습니다. 작년부터는 그렇게 마음을 전하고 싶은 기념일이 되면, 선물을 사서 보내는 대신 성당에 가서 미사 예물을 넣고 기도하는 걸로 대신하곤 합니다. 저 역시 한 해 한 해 거듭될수록, 갖고 싶다거나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은 별로 더라고요. 갖고 살던 물건들도 정리하기 벅차서 살림살이 늘어나는 게 그다지 반갑지 않아요. 물건보다는 생의 마지막 날이 올 때까지 너무 흉하게 살지 않도록 누군가 기도해 주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기도에만 의지할 수는 없는 일! 생을 아름답게 완주하기 위해선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내면의 힘을 응축하며  이제 막 시작되는 노년의 겨울을 보내야겠지요. 올해 입동은 그런 겨울살이의 첫 발걸음을 떼는 절기입니다.

이번에는 채도가 낮은 파스텔 분홍빛 다이어리를 구입했어요. 내년엔 올해보다 고운 빛으로 살기를 바라며. 펜꽂이도 같은 색으로 만들어 보았지요.

[또 하나의 달력 / 전례력]

위령성월을 보내고 있는 11월은 대림 시기를 준비하는 달이다. 연중 시기는 연중 34주간으로 마무리되는데 그 사이에 평신도 주일, 성서 주간,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들어 있다. 또 라테라노 대성전, 베드로와 바오로 대성전 봉헌 축일도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남의 나라 성당일 뿐인 대성전 봉헌을 전례력에 넣은 데는 특별한 의도가 있을 터. 아마도 '성전'이 단지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봉헌된 나 자신과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는지.

한국 교회가 평신도 주일이라고 정한 것은 별로 달갑지 않다. 그래서 전에 써 놓았던 글, I am 평신도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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