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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이민이야기 5 – 낯선 땅, 독일. 그리운 고향


꽃길만 펼쳐질 것 같은, 아니 그래야만 하는 독일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것만 바라보고 이 머나먼 땅으로 온 게 아니었던가. 처음 일주일은 아이들도 나도 너무 신났었다. 한국 토박이로 살던 촌놈을 유럽 땅 한가운데에 데려다 놓았으니 모든 게 너무나 새롭고 신기했다. 일단 공기가 너무 깨끗했고, 거리와 건물들도 너무나 멋져 보였다. 서로 눈에 띄려고 경쟁적으로 달아놓은 형형색색의 간판이 달린 한국의 거리와 달리, 어디가 상점이고 주거지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정하고 통일되게 정돈된 건물 외관이 참 멋스러웠다. 한국의 나무들보다 적어도 두배 이상씩은 커 보이는 가로수들도, 뭐라고 적혀있는지 읽을 수는 없었지만 알파벳으로 적힌 표지판들까지 다 너무 멋졌다. 유행을 느낄 수 없게 수수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보며, 진정 내가 유럽에, 그것도 독일에 와 있구나 실감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우리를 둘러싼 새롭고 신기한 것들이 낯설고 불편한 것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주위를 둘러싸던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우리 네 가족을 제외하면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우리가 심한 욕을 한다 해도 독일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 거다. 반대로 말하면 그들이 뭐라고 해도 우리가 못 알아듣는다는 말이 된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는 거였다. 멀쩡한 몸뚱이로 서 있어도 투명인간처럼 되어버리는 것,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못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이 낯선 땅에서 나 한 사람 없어진다 한들,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또한 우리 주변에 늘 함께 있었던 가족들, 친구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인터넷이 발달해 화상통화가 가능하다지만, 실제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고 몸을 부대끼며 함께 지내는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시부모님께서 아이들을 자주 봐주셨기 때문에 친척들이 늘 곁에 있었고, 살았던 아파트 단지도 놀이터가 가까워 현관문만 열고 나가면 언제든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그들을 쉽게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큰 슬픔과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한국을 떠나올 당시, 첫째 아이는 한국 나이로 8살, 초등학교 입학을 해야 했지만 바로 독일로 넘어왔다. 둘째는 6살이었고 유치원에 다닐 나이였다.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것은 3월이었는데, 독일 교육시스템으로는 9월에 새 학기가 시작된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유치원에 등록할 수 있지만, 유치원은 공급 부족으로 적어도 6개월에서 1년은 기다려야 겨우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첫째는 유치원을 다니지 못하고 9월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될 것이고, 둘째도 부지런히 유치원 자리를 알아봐야 겨우 등록할 수 있는 처지였다. 학교도 유치원도 등록하지 못한 채, 텅 빈 집에서 매일 같이 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일로 이사 간다며 한껏 부풀었던 기대감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고, 이제는 쪼그라들 만큼 작아져서 이제는 그리움과 향수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우리를 오히려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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