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 고향 마을은 온통 논으로 둘러싸인 들판이 펼쳐져 있을 뿐, 나지막한 구릉 하나 없고, 밭뙈기조차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강변 둑길과 철로를 따라 군데군데 푸성귀나 고추, 호박 같은 것들을 심은 작은 밭들을 볼 수 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둑길 한구석 풀이 무성한 묵정밭을 일궈, 철 따라 고추와 배추 심고, 상추 심고 파를 심어 가난한 가족들의 입을 꾸리셨다.
이른 여름부터 우리 집 밥상엔 된장과 풋고추가 늘 함께 했다. 어린 나이인데도 난 고추를 제법 잘도 먹었다. 입안이 얼얼하면 혀를 둘둘 내두르면서도 찬물 한 모금 마시고 나선 다시 고추를 물곤 했다. 할머니는 이런 나를 위해 안 매운 고추를 골라 주셨지만, 내 기억엔 안 매운 고추는 없었다.
그 시절 우리 집 마당 모퉁이에는 자그만 닭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애지중지 키운 닭들이 알을 낳으면 어머니는 달걀을 짚으로 엮어 장에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탰다. 어릴 적 달걀은 더없이 귀한 것이어서 달걀을 먹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가끔씩 깨진 달걀이 있을 때나 달걀 맛을 볼 수 있었다.
여름이 되면 아버지는 틈나는 대로 개구리를 잡아오시곤 했다. 잡아 온 개구리는 삶아서 닭에게 먹이기도 하고, 멍석에 널어 말린 후 곱게 빻아 겨울철 닭 사료에 섞어 먹이기도 했다. 내가 국민학교 삼사 학년쯤 되었을 때부터는 나도 개구리를 제법 잘 잡았다. 개울과 논두렁 밭두렁 이곳저곳을 쏘다녔지만, 그중 개구리를 가장 쉽게 잡을 수 있는 곳이 고추밭이었다. 특히 이른 아침과 저녁나절 고추에 이슬이 맺힐 때면 개구리가 고추밭에 많이 모였다. 할머니는 고추에 맺힌 이슬을 따먹으러 개구리가 고추밭에 많이 모인다고 하셨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지금도 아리송하지만, 내게는 고추밭 만한 개구리 사냥터가 없었다. 물에 빠질 염려도 없고, 징그런 뱀도 고추밭엔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고추밭이랑을 헤매며 개구리 잡기에 여념이 없을 때, 동네 고추밭주인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 녀석아! 개구리를 잡는 게 아니라, 고추를 다 잡겠다"
내가 고추밭 안으로 들어가 고춧대를 부러뜨리고 고추를 떨어뜨리는 걸 보신 모양이었다.
도망치는 내 뒤통수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한 번만 더 고추밭에 들어가면 니 고추도 따버릴 거다...."
그 뒤로도 나는 여러 번 그 고추밭에 들렀지만, 다행히 들키지 않아서 내 고추는 여전히 건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