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통제하려 했던 딸

by 에시

엄마에게 나는 잔소리를 많이 한다.

"살 뺴야한면서 왜 이렇게 짜게 먹어."

"밥도 없이 김치국물은 왜 늘 그릇 바닥까지 긁어 먹는 거야."

"바쁜 일도 없는데 왜 신호등이 곧 바뀔 것 같으면 그렇게 뛰어, 위험하게."

"무릎에 무리 안 가는 운동 알려줬잖아, 왜 그건 또 안 해."

이 말들은 모두 엄마를 위하는 걱정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중에 더 아프지 않게 미리 막아두려는 마음에서 나온 말들이라고.

솔직히 말하면,

나중에 내가 더 돌봐야 할 일이 늘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어디엔가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 ‘걱정’이라는 말이 나를 변명처럼 숨겨주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엄마가 내 말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내가 알려준 방식대로 지내지 않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걱정보다 먼저 올라오는 건 불안이었고,

불안은 곧 짜증이 되었고,

그 짜증은 목소리를 키우는 이유가 됐다.


사실은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그 불안이 스트레스로 바뀌어

엄마를 내 기준 안에 두려는 말들이

무심코 튀어나왔던 것이다.

나는 그걸 통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의 말이 조금 세게 나왔을 뿐이라고,

엄마가 매번 같은 행동을 반복하니까

내가 지친 거라고,

왜 이렇게 말이 안 통하냐며 소리를 높였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잊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알 수 없는 그 반복 앞에서

내 말은 어느새 잔소리가 아니라

질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엄마가 지금처럼 살다가

더 아프면 어쩌지.

넘어지면 어쩌지.

결국 내가 더 많은 돌봄을 책임져야 하는 순간이

생각보다 빨리 오면 어쩌지.

그런 생각들 앞에서

엄마가 앞으로도 지키지 않을 것들을 미리 걱정하며

‘내가 더 책임져야 할 미래’가 커질까 봐

나는 엄마를 내 통제 안에서 움직이게 하려 했던 것 같다.


그 두려움 앞에서

나는 엄마를 나의 계획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내가 정한 안전선,

내가 정한 생활 방식,

내가 생각하는

‘이 나이의 엄마라면 그래야 하는 모습’ 안으로.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하면서.


내가 그렇게 자라서 그랬을까?

엄마의 기준 속에서, 엄마의 걱정 속에서

잘 자라야 했던 딸이었기 때문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나 역시 엄마 뜻대로만 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엄마는

듣기 싫은 딸의 잔소리를

“그래도 자식이 있으니까 이런 말도 해주는 거지”라는 말로

애써 포장하며

섭섭함과 서운함을 삼킨 채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과 통제는 아주 가까이 붙어 있어서

나는 그 경계를 자주 헷갈린다.

생각보다 아주 얇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던진 말들이

엄마를 보호한 게 아니라

엄마를 숨 막히게 한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제는,

엄마를 바꾸는 딸이 아니라

엄마를 있는 그대로 두는 딸이 되는 연습을 한다.

말을 고르는 연습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연습을.

바꾸려는 마음 대신

지켜보는 마음을.

말을 줄이는 연습,

기다리는 연습,

그리고

엄마의 삶을 엄마에게 다시 돌려주는 연습을.


엄마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보다

이미 충분히 살아온 사람으로

존중하는 연습을.

아마 나는 여전히 실수할 것이다.

또 걱정이라는 얼굴로

통제를 꺼내 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적어도 이제는 안다.


엄마는

내가 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보다 먼저,

자기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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