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의미와태도
“왔어?”
“네, 다녀왔어요! 오늘 날씨가 포근해서 산책하기 좋겠어요. 나중에 다녀와요!”
“그래? 그럴게.”
딸아이는 씻고 출근 준비하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조금 더 이 시간을 즐길 수 있지만, 그녀의 등장으로 공기의 흐름이 잠시 흐트러졌다.
레코드판은 여전히 돌고 있었고, 커피도 아직 남아 있었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는 이 자리는 명당이다.
나이 든 고양이처럼 살살 졸음이 몰려오지만, 굳이 피하지 않는다.
책을 읽다가 졸고, 다시 읽다가 또 졸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시간 속에 머문다.
“아빠, 들어가서 주무세요!”
“안 잤어.”
“어제 잘 못 주무셨어요?”
“안 잤다니까~ 너도 커피 한잔 해.”
“네, 커피 한잔 해야겠어요.”
그녀는 능숙하게 커피머신을 켜고, 고민도 없이 항상 마시던 캡슐을 꺼내 넣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커피 향이 다시 집 안 곳곳으로 퍼졌다.
영할아버지의 단잠은 그 향과 함께 달아났다.
“아빠, 전화 울려요!”
영할아버지는 화면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이제 그에게 전화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화 속 이름은 오래된 친구, 김씨 할아버지였다.
“그래, 내려가면 연락할게. 이번 주 지나면 내려갈 거야. 그래~”
전화를 끊자마자 딸이 물었다.
“누구예요? 김씨 아저씨? 잘 지내신대요?”
“김씨가 암이야.”
“네?”
놀란 듯 딸의 눈이 커졌다.
“왜요? 건강하셨잖아요? 증상이 있었대요? 자식들은 뭐래요? 어디 병원 다니시는데요?”
놀란 만큼 그녀의 입에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얘야, 진정해. 검사했지. 했으니까 알게 된 거고, 지금은 통원치료하면서 약 먹고 있대.
어떻게 할 건지 같이 고민하고 자주 연락하고 있어. 오늘도 약 받아서 먹었다더라.
좀 늦게 발견했는데, 다행히 암 보험을 많이 들어뒀더라고.
그래서 비싼 약을 쓰는데도 예후가 좋아. 덜 아프다네.”
영할아버지는 갑상선암을 겪고, 치료를 마친 사람이다.
그래서 김씨에게는 선배 같은 친구로서, 남은 한 사람으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에겐 서로가 애틋하다.
“우리 나이 되면 다 아파.
김씨랑 내가 친구들 장례는 다 치렀다. 그런 나이야.”
“알아요. 그래도 두 분은 오래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김씨 아저씨가 암이라니… 그 집 자식분들도 많이 놀라셨겠네요.”
마음 여린 딸이다.
그녀의 눈가가 살짝 젖는다.
“놀랐을 거야. 그래도 잘할 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동시에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씩 마셨다.
“내가 아파보고 나니 말이야.”
영할아버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병원들도 나름의 신념이 있고, 사람들을 살리려는 목적이 있지.
근데 만약 내가 다시 암이 재발하거나, 다른 병이 찾아와도…
이젠 받아들이려고.”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이가 들면 원래 고장나는 거야.
고치려는 마음은 좋지만, 이미 닳을 만큼 닳은 몸을 억지로 고치려다
더 힘들게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그게 맞나 싶어.
젊은 의사들은 알고도 시도하겠지.
그게 그들의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죽음’을 조금 다르게 보고 싶어.
어쩌면 많은 노인들은
자신의 몸 어딘가가 고장난 줄도 모르고 살다가 가잖아.
굳이 어디가 아픈지 찾아가며,
치료한답시고 몸을 더 망가뜨리고 싶진 않아.
그래서 지금은 잘 먹고, 잘 걷고,
올해는 기차여행도 많이 다녀보려고 해.”
처음 암을 진단받았을 때,
그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왜 나지?’
그동안 건강만큼은 자신 있었던 영할아버지에게
그 소식은 충격이었다.
실망이었고, 자책이었고,
무엇보다 받아들이는 시간이 쉽지 않았다.
“덜 힘들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치료의 고통보다 더 버거웠던 건,
암보다 깊게 파고드는 우울함이었다.
손녀들의 웃음이 그를 살렸다.
그 덕분에 다시 건강을 되찾은 그는
이제야 ‘늙음’을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지금 딸에게 하는 말들은
하루아침에 생긴 생각이 아니었다.
그 시간을 지나며, 몸과 마음으로 걸러진 말들이었다.
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했지만,
아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 한쪽이 조용히 저려왔다.
‘괜찮다. 괜찮아.’
영할아버지는 생각했다.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요. 그래도 너무 슬퍼요.
우리가 이제 ‘죽음’을 이야기할 나이가 되었네요.
그래도 아빠는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어 주세요.”
“그럼, 그럴 거야. 우리 손녀들 대학 가고 결혼하는 것도 봐야지.”
그제야 딸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김씨 아저씨가 아프신 건 너무 슬퍼요.
아빠가 옆에서 많이 도와주세요.
아빠 수술하실 때도 먼 길 와서 도와주셨잖아요.”
“그랬지.
그래도 수술할 땐 딸보다 친구가 편하더라.
너 같으면 병실에서 얼마나 잔소리했겠냐.”
“내가 뭐 얼마나 잔소리한다고요.”
딸아이의 커피잔 김이 천천히 식어갔다.
그는 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제 곧 출근하는데, 기분 좋게 출근해. 오늘도 퇴근 늦니?”
“네, 오늘도요.”
“그래, 수고하자.”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