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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사건

by 자주적인 결정 중 Feb 18. 2025


그 사건이 발생한 걸 인지한 것은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각이었어. 퇴근할 때 챙겨갈 시험 문제를 꺼내려고 캐비닛을 열었지. 일단 내가 출제에 참여한 2학년 시험지와 답안지를 한 번 더 검토해야 하는 상황이었어. 그리고 그간 너무 바빠서 검토 부탁을 받아놓고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3학년 시험지도 추석 연휴 동안 한 번은 봐야 했지. 혹여 문제 오류가 있으면 큰일이니까. 게다가 연휴 끝나면 곧 시험이고 나는 연휴 이후에도 나는 계속 바쁠 예정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니? 캐비닛에 고스란히 넣어두고 일주일도 넘게 단 한 차례도 꺼낸 일이 없는 시험지 파일 세트가 감쪽같이 사라진 거야.


그제야 아침에 출근해서 가방을 넣어두려 할 때 내 캐비닛에 열쇠가 꽂혀있는 걸 보고는 아차 싶었던 것이 떠올랐지. 시험 기간인데 기밀 서류를 보관해 둔 캐비닛을 잠그는 걸 깜빡하고 퇴근했던 거잖아. 전날 정신없이 업무를 보다가, 교직원 연수에 참석했다가, 헐레벌떡 가방을 싸 들고 퇴근했거든. 서두르는 통에 캐비닛 잠그는 걸 잊고 나갔던가 봐.


곧장 1교시 수업에 들어가느라, 그 후에는 업무에 치여 있느라 시험 문제가 잘 있는지는 살피지도 못했고. 그리고 모두가 퇴근한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거지. 내가 캐비닛 속에 마구 넣어뒀던 서류뭉치를 포함해서 서랍과 책장, 파일철을 몇 번씩 뒤졌을지 한 번 상상해 봐. 간절한 마음으로 이리 뒤져보고, 저리 뒤져보고, 다시 이리 뒤져보고, 다시 저리 뒤져보기를 반복했지. 결국 포기하고 퇴근하는데, 정수리에서 뒷목으로 차가운 피가 흐르는 느낌이었지. 아주 커다란 충격을 마주했을 때 몇 번 느껴 본 느낌인데, 넌 그런 적 있니?


결론적으로, 추석 연휴 내내 두 개 학년의 시험 문제를 다시 출제했어. 참고 참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훔치면서 말이야.




왜 고민하지 않았겠니. 수백 번도 더 고민했지. 가장 먼저는, 긴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 요청을 하곤 하던 전도사님께 전화를 드렸어. 늘 챙겨주시고 기도해 주시는 참 따뜻한 분이거든. 아마 같은 교무실에 근무하는 기간제 선생님이 훔쳐 간 것 같다고, 면접 볼 때부터 이상했다고 침 튀어가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어. 전도사님이 근심이 가득한 음성으로 공감을 해주시더라고. 실은 시험지 도난 사건 말고도 우리 학교에 이상한 사람이 몇 사람 더 있는 것 같다고 마음속 이야기를 마저 토해내려는데,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으니 담당 목사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고 통화를 마무리하시더라. 아, 내가 너무 흥분해서 과했는가 보다 싶었어. 알겠다며, 죄송하고 또 감사하다며 전화를 끊었어.     


다음 날 예배 후에 목사님과 전도사님을 만났어. 무슨 첩보요원이라도 된 것처럼 주위를 살피며 사람이 적은 카페로 갔지. 아주 민감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그 여자가 면접을 보던 날부터 시험 문제 도난 사건까지 설명하면서, 눈물 콧물을 쏟아냈어. 왜 이런 일들이 내게 닥치는지 모르겠다고. 사명자로 살아가고 싶어서 늘 아등바등해왔다고 말하면서는 솔직히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던 것 같아.


실은 시험 문제를 다시 출제하는 대신, 시험 문제 분실 자체를 모르는 척하고 넘길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지. 그렇게 추론한 이유도 설명했는데, 너도 한번 들어 봐.


일단 학생들은 교무실에 출입할 수 없는 기간이어서 학생 소행일 확률은 매우 낮아. 교사가 훔쳐 간 것이라면, 시험 문제를 유출할 목적이 있거나 아니면 나를 골탕 먹이고 싶어서 그런 것일 거야. 그리고 시험 문제를 유출할 목적이었다면 3학년 시험지를 함께 가져갔을 리가 없어. 왜냐하면 3학년 2학기 성적은 재수를 하지 않는 이상 대학입시에 반영이 안 되거든. 그래서 선생님들은 이 문제를 학생들이 끝까지 읽어보기나 할까, 자조하면서 3학년 2학기 시험 출제에 임한단 말이야. 그런데 아무도 관심 없는 시험지를 훔쳐서 유출을 시도한다? 말이 안 되는 거지.


그러면 자연히, 내가 추석 연휴 내내 시험 문제를 다시 출제하는 수고를 하게 만듦으로써 나를 괴롭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게 돼. 그리고 시험 문제 유출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냥 문제를 다시 출제하는 대신 그냥 시험 문제 분실한 자체를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면 된다는 거지.


그러다 정말로 시험 문제가 유출되면 어떡하냐고? 그러면 누가 어디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그런 소행을 벌인 것인지 실마리가 드러날 확률이 훨씬 높아지잖아. 설마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겠느냐는 거지. 게다가 생각해 봐. 남의 물건을 훔쳐서 다른 사람에게 넘긴 사람이 잘못이니, 아니면 잃어버린 사람이 잘못이니?


물론, 둘 다 잘못이지. 시험 문제 같은 보안 문서의 관리를 소홀히 한 나의 책임이 분명히 있으니까. 그 부분이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부분이었고, 역시나 결국은 두 개 학년 시험 원안을 처음부터 다시 출제해야 하나, 하는 고민을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도돌이표이기도 했어. 윤동주 시인도 노래했잖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도돌이표보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라고 표현하면 좀 더 멋져 보일까? 아무튼. 목사님도 전도사님도, 신앙인으로서 내 잘못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갖는 게 옳겠다는 결론을 내리셨지.


그러겠노라고, 책임감 있는 신앙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니 마음은 좀 편해지는데, 눈물이 또 흘러내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어.


그건 그렇고, 그 기간제 교사 말고도 우리 학교에 이상한 사람들이 대여섯 명 더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려는데 이번에는 목사님께서 가로막으시더라고. 내 모습이 또다시 타당한 근거 없이 사람들을 이리저리 의심하는 모양인가 보구나, 싶어서 얼른 입을 틀어막았지. 내가 또 인정은 빠르잖냐.




그렇게 해서 추석 내내 노트북과 한 몸을 이루고 문제를 다시 낸 거야. 근데 이 대목에서 나 자랑 좀 할게. 꿋꿋하게 문제를 다 내더라며, 심지어 이전 문제보다 훨씬 좋은 문제를 내는 걸 보니 한사랑 선생님 정말 대단하다며 이 일을 알고 있는 몇몇 동료 선생님들이 교장 선생님께 입이 마르도록 내 칭찬을 하셨더라고. 에이 좀 봐주라. 나 진짜 힘들었잖아. 시험 문제 내기 불과 며칠 전까지도 눈에 실핏줄이 다 터지도록 과로하던 중이었다고. 그걸 본 누군가는 나를 과로사로 이끌고 싶었던 것 같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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