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낌새가 이상했던 일은 그전에도 계속 있었어. 출근해서 알아보면 될 것들을 카톡으로 계속 질문을 해서 짜증을 유발하질 않나, 자녀 계획에 대한 대화 중에 자기는 아이를 가질 계획이 없다고 했다가 곧 가질 거라고 했다가 말을 이리저리 계속 바꾸질 않나, 자신의 미모를 뽐내며 다른 동료에게 의도적으로 상처 주는 말을 하질 않나. 뭐, 그런 일들에 일일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게 쿨하지 않은 태도라는 것은 알아. 내 안에도 있는 연약함이니까.
그런데, 면접 장소에서 수업에 대해 그렇게 열성적인 태도로 말하던 사람이, 도서를 활용해서 1학년 과학 수업을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진행해 볼까요, 하고 논의를 시도하는데, ‘저는 진도 나가기 바빠서 그런 수업 안 해요.’하고 내 말을 딱 잘라버리더라니까.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어. 내 짝꿍 진솔이 선생님이 업무 전화기에 대고 당황한 기색으로 뭐라 뭐라 한참 동안 말씀하시는 거야. 나보다 한참 연배가 낮은 선생님이신데 워낙 마음이 여리셔서 평소에도 남에게 싫은 말을 못 하시는 성품이라,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하신 상황인 것 같더라고. ‘선생님, 저를 좀 바꿔주시겠어요?’하며 내가 수화기를 넘겨받았지. 올해 새로 오신 국어 선생님이셨어. 사연인즉슨, 공유 문서에다가 본인이 깜빡한 시험 출제 범위 기재를 대신 좀 해달라는 요청이었어.
그런데 그게 너무 이상한 거야. 진솔이 선생님은 일단 평가 업무 담담자가 아니셨고, 시험 범위 같이 민감하고 중요한 정보를 대신 기입해 달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거든. 게다가 말투가 어땠는지 아니? 진솔이 선생님께서 자신의 설명을 ‘못 알아듣고 계시는 것 같으니’ 이왕 전화를 받은 김에 나더러 대신 좀 써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겠어? 우와. 아침부터 기분이 팍 상해 버렸지 뭐니. 그래서 내가 공격력을 10% 정도 장착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말했지.
“죄송하지만 그건 실수가 있으면 안 되는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니 직접 쓰시는 게 맞을 것 같네요.”
그랬더니 오늘까지가 마감 기한이네 어쩌네 하면서 그냥 좀 써달라는 거야. 공격력을 7%, 목소리 크기를 2% 정도 높여서 말했어.
“오늘이 마감 기한인 것까지 알고 계셨으면 공유 문서 링크를 따로 저장해 두셨어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부탁을 하시는군요.”
국어 선생님은 여전히 파워 당당한 말투로 다음과 같이 말했어.
“아, 네. 알겠습니다. 제 카톡으로 공유 문서 링크를 보내달라고 할 테니 솔이 선생님 좀 바꿔주세요.”
알겠습니다, 하고 바꿔드리지 말고 그냥 월요일에 출근해서 쓰시라고 하거나 아니면 업무 담당 선생님께 전화하시라고 말하고 끊을 걸 그랬어. 나의 날선 전화 응대에 진솔이 선생님이 더 당황하셨던 것 같기도 해서 말이야.
진솔이 선생님도 전화를 끊으신 후에는 아무래도 국어 선생님의 요청이 석연치 않게 여겨져서 진솔이 선생님께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했어.
이렇게 민감한 업무를 대신해 달라는 부탁을 종종 하셨었나요?
- 아뇨.
선생님의 업무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 정도로 평소에 친하셨나요?
- ...아뇨.
어째서 오늘까지 마감 기한인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링크를 챙겨갈 생각은 안 했으면서 아침부터 전화를 해서 입력해 달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것도 탁상용 업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시고?
- 그러게요.
순식간에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 문제의 그 여자는 같은 교무실에서 전화가 걸려오던 순간부터 우리 대화를 고스란히 듣고 있었고 말이지.
그런데 갑자기 진솔이 선생님의 업무 전화가 다시 울리는 거야.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이번에는 아예 내가 받았어. 역시나 아까 그 국어 선생님이었지. 그런데, 방금까지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던 음성이 순식간에 '순한 양' 버전으로 바뀌어 있더라니까.
“아, 선생님~ 저 방금 전화드렸던 국어 교사인데요~ 그냥 제가 그냥 학교에 가서 입력할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오호호호.”
전화를 끊은 후, 나의 의아함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어. 그리고 그 음성이 그 여자 귀에도 울려 퍼졌지.
“국어 선생님께서 1~2분 만에 갑자기 태도를 바꾸셨네요. 마치 같은 공간에서 듣고 계셨던 것처럼.”
며칠 후에 다른 교무실에 들러 수업 논의를 하고 나오는데 국어 선생이 나를 따라 나오는 게 아니겠어?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때 시험 범위 작성을 못한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아니, 들키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작성하는 걸 잊고 있었던 게 갑자기 생각나서... 오호호호.”
그러면서 변명을 늘어놓는데, 나는 변명 속 말실수를 통해 더욱 확신하게 되었지. 국어 선생님도 ‘들키고 싶지 않은’ 뭔가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버나드 쇼가 그랬다던가, 세상에 말실수란 없다고.
이로써 나는 그 여자 패거리를 한 명 더 알게 된 거야. 참, 그 와중에 주황색 단발머리 이만애 강사님은 어땠는지 아니? 아무런 용건도 없이 우리 교무실에 들어와서 한 번씩 스윽 둘러본 후 그냥 나가버리기를 두어 번 정도 했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듯이, 모두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것처럼, 어둡고 차가운 눈초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