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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회복

19화: 회복

by 인디라이터 호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 침대 위로 쏟아지는 볕이 눈부셨다. 오전 열 시를 훌쩍 넘긴 시각, 남편은 부스럭 거리며 이불을 뒤척이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깨우지 않고 출근을 한 뒤였다. 그저께 끓여 둔 죽을 한 숟가락 뜨고 카페인이 거의 없는 커피를 뜨거운 물에 태워 반은 개수대에 붓고 남은 반을 마시며 소파에 풀쩍 주저 앉았다. 바꿀 때가 지난 소파 쿠션은 여기저기 꺼져 기울기가 불안한 듯 나는 허리춤을 바로 하고 편한 곳을 찾아 등을 기댔다.


‘오늘은 무얼 할까?’


내게는 눈부셨던 지난 날의 영광들이 원래 내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시간들이 나를 스쳐 지나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분명 낡아지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다시 새로워지고 있는 기분도 들었다. 아픔의 나이테가 둘러지고 나의 나무가 한 뼘 더 자란 듯 했다.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거의 사라졌을 무렵, 이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생각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지난 날의 시간이 바야흐로 끝을 맺으며 늘어나는 보조제 개수와 함께 중년의 문턱을 간신히 넘은 나는 오늘 이 자리가 내가 다시 새롭게 서야 하는 할 곳임을 깨달았다. 나와 우리를 향한 크고 작은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그 너비와 폭과 시기를 이제는 조정해야 했다.


마음이 정리가 되고 나니 삐걱거리는 몸도 견디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매일 새벽이면 집 앞 강 지류 옆 파크 골프장을 여는 수많은 젊은 노목들을 보며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나의 미래의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철을 달리하며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도 자신들을 보라며 내게 이야기해주는 듯 했다. 단지 안 오솔길에 떨어진 누렇게 떠버린 잎사귀들과 내 존재가 한 치의 차이도 없음을 깨달았다. 처음의 슬픔이 아닌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에 고개가 숙여졌다.


단지 안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오니 걱정하던 주영 언니에게서 ‘괜찮냐’는 안부의 톡이 와있었다. 어젯밤 언니는 누구나 겪는 일을 네가 한 번도 겪어 보지 않고 살아와서 그러지 않아도 될 일을 남들보다 더 집중하는 탓에 마음이 더 괴로운 것이라고 했다. 맞다. 그럴지도 모른다. 스스로 빈 구석이 없을 거라며 너무 자만한 탓일지도 모른다. 담담한 마음이 들어 쉬이 웃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나의 푸르른 청춘과 젊음이 남들보다 길었다고 생각하니 그다지 불공평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발 더 뗄 수 있을 것 같은 멋적은 기분이 한 줄기 희망처럼 마음 위로 올라 왔다.


그렇다. 누구나 겪는 일이고 지금 필요한 건 선 자리에서 정비를 다시 해야 하는 것이다. 한번도 범주에 들어온 적 없는 새로운 키워드지만, 세월을 먹는 나무는 때때로 잘리고 꺾이며 때를 따라 가지 치기를 해주어야 한다. 받아 들일 수 없노라며 항변했던 울분 어린 마음이 시간에 꺾이며 한결 평안해졌다.


열과 성을 다하느라 아침 저녁 사력을 다해 걷던 산책에도 힘을 뺐다. 갑자기 체중이 줄어 든 탓인지 몸의 관절들이 기운을 내지 못하고 쉬어 달라고 말하는 듯 했기 때문이다. 낮에는 선글라스를 꼈다. 의상에 맞추어 내 얼굴형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아껴둔 선글라스가 아니라 넙적하고 색이 짙어 내 지친 안구를 보호해 줄 만한 튼튼한 아이를 골라 긴장한 눈에게도 여유를 주었다. 어쩌다 만난 친구들과 힐링 수다를 떨며 푸짐하게 나누던 풍성한 음식들도 적당히 몇 술 뜨고는 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포장된 나를 위한 조치가 아니라, 날 것의 내가 더 생생해지도록 하기 위한 절제의 항목들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자 몸은 조금씩 예전의 컨디션을 되찾아 주었다.


어지럽던 머리와 가끔 울리던 귀 속 이명도 횟수가 잦아 들었다. 코로나로 시기를 놓쳐 올해야 받은 늦은 건강 검진에서 의사는 다행히 잘 관리하면 되는 수준이라는 고무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몸과 마음과 머리 속 독소들을 빼내고 건강을 다시 채우느라 허비한 죽은 시간들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머리가 숙여 졌다. 나보다 앞서 시대를 살며 세월의 풍파를 겪어 낸 모든 이들에 대한 경외감이 마구 솟아 올랐다. 그렇게 낮이 밤 같고 밤도 밤 같던 휴면의 시간은 코로나와 함께 내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유난히 더운 날이 길던 여름이 쉬이 물러가지 않던 가을의 첫 자락, 예전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며 하루가 온전했는지 자문해 보았다. 이제 모래시계는 절반의 모래를 다 삼키고 한 알도 남기지 않은 채 거꾸로 돌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한대의 시간 속에 산다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젊음을 지나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아무것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우선은 그걸로 되었다. 내 안의 내면이 평정을 찾았고 나는 새로운 시간과 환경 속에서 다시 살아 남았다. 그거면 되었다.


그런데…


다시 꿈이 꾸고 싶어졌다. 허비 당한 세월이 아까워 다시 내 꿈을 꾸고 싶어졌다. 그것이 무슨 꿈이든 오늘 밤 내 머리 속에 들어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다시 깊은 잠을 청했다. 일어날면 밤은 온데간데 없으리라.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깨끗한 아침을 꿈꾸며 여느날처럼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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