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에서 벗어나서
얼마 전, 정신과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내가 감정에 태깅하기를 잘 못한다는 것이다. 난 항상 내 감정이 무엇이고 내가 왜 그런 걸 느끼고 어디서 그런 이유가 생겼는지를 버릇처럼 생각하는 사람인데? 처음엔 의아했으나 이내 인정하고 말았다. 나는 요즘 '혼란스러워'했다. 약을 먹어 치료하는 건 불안과 우울증세. 그런데 다른 이름을 가진 감정을 그것으로 없애려 했다.
1. 너무 깊은 우울
우울증이라고 확언을 받은 지는 10몇 년이 되어간다. 어릴 적부터 찾아온 불면증 때문에 초등학교 때부터 정신과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게 분명 무슨 이상이 있다, 그건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다 몇 년간은 우울만을 쏟아냈다. 내 글에는 우울이 덕지덕지 붙어있었고, 나는 그걸 토해내면서도 그걸 도저히 따스하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토하는 일도 멈출 수가 없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찾아온 우울증이란 그런 것이었다. 모든 게 우울로 점철되는 것. 분노도, 슬픔도, 증오도, 배신감도, 실망도, 우울이 모든 걸 집어삼켜서 나는 우울하다는 말 밖에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한창 심리상담을 받을 때는 그런 말도 들었다. '우울한 자신을 인정해 달라'는 말. 나는 그 말씀에 태깅 이야기 때보다 훨씬 혼란스러웠다. 난 맨날 우울을 말하는데, 이런 내가 우울한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니 무슨 소리일까.
그건 아픈 나를 인정하라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아프니 당연히 몸은 기능을 못한다. 그런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건강한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며 나를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자신. 그래, 우울증에 걸린 나에게 건강한 나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울증에 걸린 나는 당연히 치료받고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태인 것을.
2. 감정 태깅하기
약물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 지독한 우울이 조금 걷혔다. 이제 우울이 집어삼킨 것들을 바라봐야 할 때였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은 내게 감정을 이름 붙일 줄 모른다고 하셨던 것이다. 내가 우울이 아닌 다른 것으로 괴로워하는데, 나는 그것을 그저 우울증 약으로 치료해야 할 것-그저 혼란스럽다고밖에 표현할 줄 모를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선생님은 검사 상 내가 우울까지 들어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하셨다. 그럼 그 몇 번의 밤, 나를 괴롭게 만든 건 우울이 아니라 무엇이었다는 걸까.
집에 와서 당장 일기를 썼다. 하나하나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을 썼다. 1) 집 구하기 어려움 2) 부업 문제 및 전업 가능성 3) 누구에겐 말할 수 없는 등등. 그리고 화살표를 쳐 그 옆에 서툴게 감정을 써보았다. 불안. 실망. 긴장됨. 소외감. 막막함. 화남. 외로움. 자괴감. 걱정스러움. 씁쓸함... 감정이 아닌 것도 몇 개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느끼는 대로 다 써보았다. 생각보다 겹치는 게 많았고, 생각보다 말이 잘 안 나오는 것이 많았다.
그러다 새로운 일 하나를 늘렸다. '내가 꿈꾸었던 대로 그림 그리고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있는 것'
3. 긍정 발견하기
긍정. 우울이 덮고 있던 또 다른 무언가이다. 매번 실낱같은 긍정의 끝도 우울에 먹혀버렸으니. 실제로도 저 한 마디 외에는 긍정적인 일을 쓸 수가 없었다. 기쁨. 거기서 끌어 나오는 감정도 딱 하나뿐이었다. 그것이 잠시 슬펐다. 행복도 아니고 당장 긍정이라 말할 수 있는 일이-물론 작지 않은 일이지만- 단 하나뿐이라니.
하지만 아무래도 부정은 눈앞에 있고 긍정은 몇 걸음 뒤에 있는 모양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몇 가지의 긍정을 다시 발견했다. 난 어릴 적 재미로 얘기한 것처럼 친구들과 살고 있고, 고양이와 살고 있고, 드디어 가족관계가 원만해졌다. 소중한 친구들이 다섯 손가락을 넘고, 우울이 나아가는 중이다. 그중에는 기쁨뿐만 아니라 벅참과 감동과 사랑과 든든함과 편안함이 있다.
태깅하기. 부정 외에도 긍정을 태깅하기. 나에게 어떤 부정과 어떤 긍정이 있고, 그것이 내게 현재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파악하기. 그것만으로도 나는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름 짓는 것만으로 긍정을 발견할 수 있다. 너무 눈앞에 들이밀어진 부정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긍정을 정리해 간직하는 데까지 다다를 수 있다.
이제 나도 이걸 끊임없이 연습해야 한다. 감정카드를 사야 하나 사실 고민 중이다. 그것의 필요를 이제야 알았으니. 이제는 부디 우울이 집어삼켰던 모든 작은 감정들을 하나하나 구분하고, 그에 맞추어 나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