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자주 체했던 썰
어릴 때 유독 자주 체했다. 거의 두세 달에 한번 꼴로 체하곤 했다. 말릴 수 없던 먹성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나마 먹는 걸 조절할 수 있는 이성이 좀 생겼지만 그 당시엔 먹고 먹고 또 먹다가 결국 아플 때까지 미련하게 먹었다. 제일 아프게 체했던 때는 순대의 맛에 눈을 떴을 때였다.
하루는 엄마가 시장에서 사 온 2-3인분의 순대를 있는 자리에서 혼자서 해치워버렸고, 기어코 병이 났다. 웬만한 소화불량에 효과적인 k-민간요법인 손 따기가 그날은 얼마나 심하게 체했는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피로 물들여도 얹힌 순대는 내려가지 않았다. 하루종일 앓아누워있던 난 결국 몸속 순대를 모두 게워냈고 그 여파로 한동안 순대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려서 피해 다니곤 했다. 그리고 다시는 먹는 데에 욕심을 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하고 재밌는 건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란 것이다. (아직도 순대 킬러)
그 뒤에도 참 많이 체하면서 자랐다. 특히 10대 때는 마음이 불편할 때 자주 체하곤 했다. 마음이 안 좋고 불편한 구석이 있을 때 뭔가를 잘못 먹으면 음식이 그대로 얹혔다. 그때 문득 알게 된 건 고통이란 게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마음이 편하면 아무리 복잡하고 힘든 일도 참을 수 있지만, 마음이 불편하면 밥을 먹는 단순한 일도 고통스러운 법이었다.
청소년 시절 태권도 수련회에 간 적이 있다. 당시 또래 중에 유독 말이 없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말수가 없는데 좀 묘한 느낌이었다. 눈은 초롱초롱한데 누가 입을 막은 듯이 말이 없는, 살면서 처음 보는 캐릭터였다. 그 당시 나름의 (지금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외향성을 가지고 있던 나는, 수련회 첫날 새로 만난 친구들에게 모든 고통은 마음에서부터 오는 거라는 꽤나 수준 높은 강연을 펼쳤다. 그때, 다른 때는 남들이 뭐라 하던 관심 없던 그 애가 처음으로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으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련회가 끝날 때까지 유일하게 그 아이와 친해지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그 애는 누군가 편안히 다가와주길 기다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곧잘 사람을 기다리니까. 타인의 마음이 내게 열리기를 기다리듯 내 마음도 타인에게 열리기를 기다린다. 살다 보니 내게도 홀로 무심히 괴로웠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난 누군가를 기다렸다. 입을 닫고 있는 나를 조용하게 관찰해 줄 누군가를 기다렸다. 함께 조금씩 아픔을 나눌 누군가를 기다렸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시 수련회로 돌아가, 나는 그냥 그 아이 옆에 가만히 앉아있어 보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홀로 무심히 괴로웠던 나에게도 돌아가 그 아이 옆에 가만히 앉아보는 것이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다가 시간이 지나고 그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볼 여유가 생기면, 모든 고통은 마음의 문제라는 수준 높은 강연을 한번 더 설파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아이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웃어 보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