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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교에서의 추억

by 이일삼

중학교 1학년 초,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할머니 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1년 남짓한 기간이었는데, 당연히 학교도 전학을 가야 했다. 전학을 갔던 학교는 시골에 있는 아주 오래된 학교였다. 나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다섯 동생들이 모두 졸업한 학교이기도 했다.


그 학교를 다니던 내내 어딘가 기분이 묘했다. 자전거를 타고 논 밭을 지나 등교를 하는 시간부터, 수업을 듣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다시 논과 밭 사이로 하교를 하는 순간까지. 내가 아버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당신의 과거를 체험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학생 수는 20명이 안 됐던 것 같다. 한 학년이 아니라 전교생 말이다. 1층에는 각 학년별로 반이 하나씩 있었고, 교장실과 교무실, 그리고 화장실이 있었다. 2층은 강당용으로 비워둔 커다란 공간과(사용은 전혀 하지 않았다.) 탁구대 3대가 있던 체육관이 끝이었다.


운동장은 청록색의 이끼로 가득 덮여 있었다. 잔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기분 나쁜 초록빛이 돌았는데, 정글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법한 악어 서식지와도 흡사했다.


운동장이 그렇게 된 데에는 사정이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축구는 얼어 죽을. 동네에 있는 꼬맹이들과 청년회장(65세)까지 싹싹 긁어모아서 축구팀 하나를 겨우 만들었다 치더라도, 우리 팀과 겨룰 존재(상대 팀)가 부재했다. 때문에 시골에 살던 1년 동안 축구는 고사하고 이렇다 할 육체 활동은 거의 없었다.


그럼 거기에 있는 녀석들은 뭘 하면서 놀았을까? (동산을 뛰놀고, 토끼와 꿩을 사냥하며, 하루 종일 냇가에서 천렵과 멱을 감을 것이라 생각했던 시골의 친구들은) 컴퓨터 게임을 했다. 굉장히 잘했다. 적은 인원으로도 즐길만한 게 게임 말곤 딱히 없었기 때문에 저절로 실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아이들이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으니 나도 덩달아 게임에 중독되었다. 내가 살면서 가장 게임을 열심히 하던 순간이 바로 그 시절이다.


거기에 계시던 선생님이 한 분이 기억난다. 도시에서 전학을 온 내가 시골에 사는 순박한 녀석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 굳게 믿던 분이다. 그분의 수업 시간에 농담을 한 번 했다는 이유로 학교 뒤편으로 불려 가 혼이 났었다. 오히려 나쁜 영향이라면 게임 중독에 빠져버린 내 쪽에서 받았는데 말이다. 참나.


친구들은 참 좋았다. 꼬인 게 없었다. 사실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분이 나쁘면 그대로 표현했다. 1년 남짓 한 시간 동안 아무런 마찰 없이 잘 지냈다. 나를 혼낸 그 선생님의 뒷담도 같이 까주었다. 참나.


그리고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처음 몇 년간은 시골의 친구들과는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추석과 설이 되어 할머니 댁으로 갈 때면 친구들과 만났다. 하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어느샌가 연락이 드물어지더니 이제는 전혀 소식을 듣지 못한다.


가끔 시골집에 갈 일이 있으면 예전 등굣길을 걷곤 하는데, 그때마다 녀석들의 소식이 궁금해진다. 연락을 해볼까 싶어 핸드폰의 연락처를 뒤적거리다가도, 너무 오랜 시간 단절된 탓에 매끄럽지 않을 대화를 떠올리고는 그냥 관둬버린다. 어련히 잘 지내고 있겠지.


같이 뒷담 까준 태곤아 대부야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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