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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떰띵두 Feb 26. 2024

크기와  무게

크기란?

사물의 넓이, 부피, 양 따위의 큰 정도

무게란?

물건의 무거운 정도

사물이 지닌 가치나 중요성의 정도


크기와 무게는 사전적 의미에서도 같음과 다름이 공존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차이를 잊고 살 때가 많다.

부피가 크면,

양이 많으면,

넓이가 넓으면.

그것이 무거운 것이라는 당연함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일이 잦다.

나의 일상은 무엇이 다를까?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내 기억 한켠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사실이 일상의 폭폭한 먼지를 털어내고 고개를 내밀적에는 내 일상도 매일의 그날들과는 다른 하루가 만들어진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지금의 나와는 비교되지 못할 만큼 팍팍한 일상을 살아내는 가난함의 연속이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뭐 호화찬란한 일상을 누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냥 소득과 소비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그런대로 균형된 보통의 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꽁무니 빠지게 마음이 급해지는 일이 잦다.

예전의 가난했던 나도 마음이 급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그런 기분이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나름 큰돈이 생긴 적이 있었다.

횡재수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일한 것에 비하면 꽤나 큰돈이 생긴 것이었고 이 때는 그래도 빚갚음에 한숨 돌리는 즈음이었지 싶다.

그러니 그런 배포가 생겼는 게 아닐까 한다.

배포?

앞으로 내 얘기를 들으면 배포란 말에 콧웃음을 칠지 모르지만 내게는 분명 그때 그날은 배포 큰 결정이었다.

그날 나는 내가 가진 것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게 결코 적지 않은 나름 큰맘 먹어야 될 만큼의 큰돈 백만 원을 엄마께 용돈으로 준비해 드린 적이 있었다.

만 원짜리 지폐로 잘 정돈해 묶어 백만 원의 부피를 양껏 늘려 정성스레 준비했었다.

내심 큰돈임을 내색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준비한 처음이자 마지막 큰 용돈.

물론 남편의 제안으로 준비해 드린 용돈이었기에 한결 마음은 경쾌하고 가벼웠지만  그간 매번 부모님께 드려왔던 용돈의 범주를 벗어난 정말 큰맘 먹고 드리는 용돈이었다.


이 날 울 엄마는 우리 집 거실에 조그마한 모습으로 앉아 우리가 내민 하얀 봉투를 받아 드셨고 봉투를 열고 선 눈이 똥그레져서는 입을 크게 벌리시곤 놀람과 함께 감탄을 하셨다.

그리고는 고맙구나! 고맙구나! 라며 손을 잡고 고마움을 전해 주셨다.

남편과 나는 무척 뿌듯했다.

우리는 의기양양했다.

소위 우리도 울 엄마에게 효도란 걸 했는가 보다는 생각에 우쭐했었다.

엄마는 백만 원 현금 다발을 고이 속바지 주머니에 말아 넣으셨고 몹시도 행복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웃어 보이셨다.

엄마의 그 행복한 표정이 앞으로의 우리 일상에 쭉 이어질 거라 우리는 그때 착각했었다.

그랬음에 우리는 이참에 그 행복한 만족감을 더 이어볼 참에 서툰 생각으로 엄마와의 여행을 계획했었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처음 있는 일이라 마냥 좋았다.

마냥 좋아도 될 만큼 그때 그 순간은 풍족했음에 그냥 좋을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그때 있을 수 있었음에 지금의 나는 몹시도 감사해한다.

그때 그 순간 찾아온 풍요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그런 용돈과 여행은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지금 내게 무한한 풍요로움이 함께 한다고 해도 분명 나의 삶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황폐한 삶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족여행을 떠난 것이다.

특별한 목적지를 두고 떠난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냥 차를 타고 동해 해변로를 달리다 그날의 여건에 맞춰 숙소를 잡아 쉬기로 하고 무작정 떠난 것이다.

울 엄마와의 처음 여행이었다.

경주에서 정성 담은 한정식을 먹고 보문단지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따사로운 햇볕을 쬐고 자잘한 수다를 피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

그리고 영덕에 도착했고 우리는 대게 코스요리를 먹었다. 엄마는 이날 그때 드렸던 용돈을 꺼내 썼다. 대게가 비쌀텐데 하시며 큰돈 쓰는 남편에게 귀하게 번돈 아껴 쓰라며 십만 원을 손에 쥐어 주셨던 거다. 남편은 마다하지 않았다. 혹 마다하여 엄마마음이 불편할까 엄마가 주신 돈을 받았고 우리는 엄마덕에 귀한 음식을 맛나게 실컷 먹을 수 있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다행스럽게도 울 엄마도 맛나게 드셨다.

이게 돈 쓰는 맛이구나 느끼면서 ,

웃는 엄마모습, 맛나게 먹는 내 아이의 모습, 함께 웃어주는 언니, 기꺼운 마음으로 함께하는 남편.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마냥 기분에 취해 시간을 보낼 즈음 엄마는 조금 쉬고 싶다 하셨고 우리는 서둘러 영덕 해변가 펜션을 숙소로 잡은 후 엄마는 숙소에 쉬게 하고 밤 야경이 매혹적인 해변가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엄마는 침대 한켠에 내손 한주먹만한 크기로 한껏 웅크린채 숨소리조차 들리지.않게 깃털처럼 가벼이 주무시고 계셨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계획보단 조금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음에도 철없던 나는 엄마에게 추억 하나 만들어 드렸을 거란 생각에 스스로 기특해했었다.

며칠 후 엄마는 다시 병원에 입원을 하셨고 주치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장폐색이라 그동안 어머님이 드시는 것도 어렵고 많이 고통스럽고 힘드셨을 텐데요라고.

이 말 한마디에 나는

... ...

귀가 멍해졌다

숨이 멎었다.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

... ...

그럼에도 엄마는 괜찮다며 고맙다며 손을 잡고 내게 웃음을 보여주셨다.


얼마 후 엄마는 호스피스병동으로 옮기셨다.

엄마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고 한없이 보드랍고 가벼운 손길로 나의 얼굴을 스다듬어주셨고 말알간 눈빛으로 나를 살펴주셨다.

호스피스병동에 함께 있던 환우들과 가족들께도 예쁜 내 딸이라고 자랑을 하며 웃어 보이셨다.

엄마는 내게 얘기했었다.

니가 있어  엄마는 참 좋았다!

너는 참 예쁜 딸이다!

니는 복덩이란다!

니가 얼마나 귀한 딸인데..


그리고

얼마 후 울 엄마는 아빠가 계시는 그곳으로 떠나셨다.


이후 나는 힘들었고

이후 나는 몹시도 힘들었다.


나는 엄마께 드렸던 그 한 번의 용돈에 그동안 혹여나 담고 계실지 모를 딸에 대한 염려는 모두 털어내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하는 마음을 담았었다.

그냥 엄마께 딸에 대한 염려와 걱정은 이제 시원하게 털어내셔도 좋다고 큰소리치듯 말이다.

엄마의 마음을 편히 해드릴 거란 기대로 행복했던 그 철없는 딸의 그런 마음을  엄마는 세세하게 헤아려 빽빽히 무게를 실어 주셨던 거였다.


죽을 듯이 고통스러운 그 순간에도 엄마는 내게 환히 웃어 주었다.

내 딸 참 고맙구나!

내 딸 참 기특하구나!

내 딸 참 대견스럽구나!

내 딸 참 든든하구나! 라며 말이다.


엄마는 남겨질 나를 위해

혹여나 아파하고 힘들어할지 모를 나를 위해

그렇게 애써가며 내게  하나의 행복한 기억을 남겨주셨던 것이다

엄마는 그랬다.

울 엄마는 그랬다.

울 엄마는 참 세심하게 나를 사랑해 줬다.

울 엄마는

내게 크기와 부피가 아닌 무게의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란 걸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


엄마!

엄마 딸 이제는 괜찮아

지금은 이렇게 그날의 기억을 꺼내어 얘기하고 미소 지을 만큼 괜찮아

철없는 딸의 허세와 허풍에도 이처럼 따뜻한 의미와 가치를 담아 주었으니 지금 나는 충분히 괜찮아

엄마가 담아 준 그 의미와 가치의 힘으로 지금 나는 잘 살아가고 있지


엄마!

내 엄마 허순이씨! 고마워

허순이씨  딸일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

사랑스런 울 엄마! 내가 얘기했었지

아기로 내게 와 달라고

그러기에 숨이 가쁘면 행복한 시간 보내다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자고.

기억하고 있지?

... ...


엄마! 고운 우리 엄마! 잘 지내다 우리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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