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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고비 Oct 11. 2023

Jay, Yellowknife

진동전달서비스 : 당신의 진동을 전달해 드립니다 #2.


2018년 12월.


“은우.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이 뭐 할 거야? 이번에는 우리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기로 했거든. 당연히 은우가 원하면 집에 같이 있어도 되는데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그런데 은우도 크리스마스 연휴에 집에만 있을 건 아니지?”

홈스테이 호스트인 Heather가 은우의 눈치를 본다. 얼마 전에 생긴 남자친구와 크리스마스 휴가를 집에서 보내고 싶은데 은우가 방해가 된다는 말을 돌려 돌려하고 있다.


"물론. 나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에 여행 가기로 했어."

Heather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진다. 표정에 기분이 바로바로 드러나는 사람인지라 은우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디로 가. 은우?"

"옐로나이프. 오로라가 보고 싶었거든."

6박 7일이라는 여행 조건으로 검색해 가장 위에 떠 있는 패키지여행이었다.


옐로나이프에서 해가 뜨는 시간은 12시, 해가 지는 시간은 3시. 처음부터 외출할 생각도 없었지만 외출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캐나다의 추위를 알고 있기에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추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로라 헌팅 투어가 시작되는 아홉 시가 되어서도 나가야 할까 망설일 정도였으니까.

패키지로 예약한 픽업차량 안에는 설레는 표정이 가득한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오늘의 가이드 겸 드라이버는 오늘이야말로 Kp 지수(오로라 관측지수)가 가장 높은 날이라고 잔뜩 바람을 넣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의 말에 맞장구치며 자신들의 행운을 확신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차에 탑승한 은우에게 얼핏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치워 옆자리를 내어준 사람은 앳된 얼굴의 동양인 남자였다. 차 안이 온통 축제 분위기인데도 가이드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손에 든 소설책을 뒤적이는 모양새가 평범한 관광객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을 수 없어 어떤 기분인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Jay. 오늘은 꼭 볼 거야.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 나랑 다녔는데 오로라 댄싱을 못 보고 돌아간 사람은 없어.”

사람 좋아 보이는 가이드가 남자를 굳이 챙기며 해 주는 자신만만한 말에 싱긋 웃으며 말한다.

“그래. 나도 기대하고 있어."


은우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친숙한 얼굴을 쳐다봤다. 한국 사람일 수도 있어 잠시 경계했으나 손에 든 가볍지 않은 영문 소설을 보아하니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이거나, 모국어만큼 영어가 익숙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우의 눈길을 느꼈는지 남자는 은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Jay. 너는 이름이 뭐야?"

Jay는 당연하다는 듯 영어로 말을 건다.

"은우. 발음이 어렵다면 그냥 우.”


은우의 이름을 듣고 Jay가 놀란 듯 물었다. 이번엔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그렇지만 영어에 비해 서툰 발음이었다.

"한국 사람?"

은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Jay가 반가워하며 말한다. 이번엔 다시 영어다.

"나도. 한국 사람.”

Jay는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캐나다로 이민을 온 한국계 캐나다인이었다. 영어보다 한국어가 편한 부모님 덕분에 한국어로 의사소통은 가능했지만 누가 들어도 영어는 편안하고 한국어 발음은 미묘하게 서툴러 말을 나누는 순간 그냥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저 사람 매일 저렇게 이야기해. 오늘 진짜 볼 수 있을지는 몰라."

Jay는 은우에게 비밀을 알려주듯 일부러 한국어로 말을 했다. 가이드의 큰소리와는 달리 Jay의 말처럼 한참이 지나도 오로라는 나오지 않았다. 길어지는 여정에 일행들과 자신들의 언어로 신나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이제는 지쳐버린 듯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은우도 몹시 피곤했지만 늦게 마신 커피 때문인지 잠이 오지는 않았다.

"사진 찍으러 온 거예요?"


어떻게 알았냐는 듯 Jay가 표정으로 묻자 은우가 Jay의 가방을 가리킨다. 은우도 이번에는 영어로 말을 건다.

“가지고 있는 좋은 카메라. 무거워 보이는 가방."

"너도 사진 찍어? 카메라는?"

은우도 잠깐이긴 했지만 한 때는 천체사진을 찍는 사람이었다. 날이 좋은 밤마다 사진을 찍어 리포트를 썼던 시절이 있었다. 여러 사람에게 빌린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던 탓에 어떤 카메라가 천체 사진을 찍기에 제일 좋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은우도 빌린 카메라가 아니었다면 사진 찍는 걸 좋아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아니. 나는 이걸로 괜찮은 사람.”

은우가 핸드폰을 들어보이며 말을 아꼈다.


"이틀 전에 오로라를 보긴 봤는데 너무 약한 오로라여서 조금 더 머물면서 기다리는 중이야. 약한 오로라긴 하지만 사진 한번 볼래? 사진에서는 더 강렬해 보이거든.”

Jay가 카메라로 보여주는 사진들은 일반인이 찍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사진이었다. 사진으로 보아서는 약한 오로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찍는 사람이 아니네. 설마 직업?"

“맞아. 천체 사진을 찍어.”

어려 보이는 얼굴 때문에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학생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Jay는 학생도, 그냥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도 아니었다. 은우의 추측처럼 Jay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이름난 대학을 가고, 안정된 직장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노력하던 평범한 한국계 고등학생 시절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취미로 사진을 찍긴 헸지만 직업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이었구나."

일부러 한 말이 아니었다. 은우도 모르게 부러움이 튀어나와 버렸다. 작은 소리로 말한 줄 알았는데 붙어 앉은 Jay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너는? 뭐 하는 사람인데?"

어느새 Jay의 얼굴에서 처음 느꼈던 싸늘한 기운은 사라져 버렸다. 해맑게 묻는 Jay에게 나는 너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털어놓고 싶지는 않아 말을 아꼈다.

"나는 진짜 재미없는 사람이야.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사람."


“그럼 여기는 왜 온 거야? 그냥 관광?"

"아니. 캐나다에는 파견 근무. 다음 달에 한국으로 돌아가. 돌아가기 전에 오로라가 보고 싶었고."

“다음 달에 돌아간다고? 너야말로 오로라 꼭 봐야겠다. 오로라가 나오는 순간 내가 이걸 보려고 캐나다에 왔구나 싶을 텐데. “

결국 그날 밤 꼭 나타날 거라 말했던 오로라는 나오지 않았다. 자신만만하던 가이드는 눈에 띄게 풀이 죽어 이런 날은 정말 드물다고, 오늘 이렇다는 건 내일은 꼭 나타난다는 말이라고 내일도 이 차에 타 달라고 부탁했다. 일행들이 하나 둘 내리고 나자 차 안에는 Jay와 은우만 남았다.


"나는 내일도 여기 탈 거야. 너는?"

"내일 예약은 되어 있어. 그렇지만 힘들면 쉴 수도 있고. 덕분에 즐거웠어."

은우가 차에서 내려 호텔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Jay가 뛰어오며 은우를 불렀다. 차가 멈춰 서서 Jay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우리 내일 만나서 점심 먹자. 근처에 한식당이 있어. 내가 내일 해 뜨면 데리러 올게.”

망설이는 은우를 보고 Jay가 부탁하듯 말한다.

“네가 아니면 같이 먹으러 갈 사람이 없어. 나 정말 오래간만에 한식당에 가는 거란 말이야. 같이 가 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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