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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고비 Oct 11. 2023

일주일은 짧고, 일주일이 전부였으니까

진동 전달 서비스 : 당신의 진동을 전달해 드립니다 #4.

2018년 12월 24일. 옐로나이프


갑자기 따뜻해진 차 안에 들어온 데다가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했던 은우가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Jay가 창가에 기대어 있던 은우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로 옮겨 놓고는 잠들어 있는 은우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Jay. 은우 호텔에 다 왔는데 깨워줄 수 있어?"

잠결에 자신의 이름을 들은 은우가 급히 눈을 떴다. 언제 잠든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비비며 Jay에게 물었다.

“잠들어 버린 줄 몰랐는데. 그렇지만 내일도 우리 볼 수 있는 거지?”


Jay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이상하다는 듯 은우가 Jay의 눈을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린다.

“나 내려야 해. 지금도 고민하는 중이야?"

Jay가 드디어 말을 한다. 은우가 잠들어 있는 동안 한참 동안 고민한 말이었다.

”우리 오늘 밤에 같이 있을까?”

지금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거나 앞을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난 적은 없었다. 망설이지 않고 마음을 표현한 적도 단박에 대답을 해 본 적도 없었다. 마음이 가더라도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는 말로 누군가를 뒤돌아서게 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Jay. 뭐 하고 있어. 같이 내리자."


두 사람의 상기된 얼굴이 매서운 새벽바람 때문에 빠르게 식었다. Jay가 은우의 손을 잡고 추위를 피해 도망치려는 듯 급한 발걸음으로 방까지 한달음에 뛰어 들어왔다. 은우가 힘이 들어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앉아 Jay를 바라본다.

“타투가 있었네. 영영 모를 뻔했다.”

Jay가 겉옷을 벗자 옷 속에 감춰져 있던 타투가 보인다.

“꼭 지키고 싶은 게 있던 시절이 있었어. 어렸을 때 나는 꽤 진지했거든."

Jay가 은우의 눈을 맞추며 은우의 앞으로 다가간다.

“아프지 않았어?"

은우의 손가락이 Jay의 티셔츠 속 타투를 타고 올라간다.

“그땐 뭐가 될지 몰랐으니까 마음이 아팠지. 타투가 아프진 않았어. 넌 각오가 없었어?"

Jay가 은우의 손을 잡아 멈추게 한다. Jay의 다른 쪽 손이 은우의 얼굴에 닿는다.

“살고 싶었어. 그냥 점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인간으로 살고 싶었어."

Jay가 은우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넌 너를 너무 모르는구나. 네가 차에 타는 순간 너만 보였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살 수 없는 사람이었을 텐데. 오늘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게 어떤 건지 느끼게 해 줄게. 잊지 못하게 될 거야. 나도. 오늘도."


2018년 12월 25일

“은우야. 깼어?”

“벌써 일어난 거야? 아직 해도 안 떴어.”

“해는 안 떴지만 아침이긴 해. 네가 생각한 날짜는 아니긴 해도. 메리 크리스마스."

“진짜 25일이야? "

“예전에 한국 친구들이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에 가족이 아닌 연인끼리 밤새 같이 있는다는 거야. 그래서 말도 안 된다고 한 적 있었거든. 와! 나 진짜 한국 사람이네. 그래서 말인데 나 한국 사람처럼 하나만 물어볼게. 너는 몇 살이야? 나는 스물일곱이거든."

”생각보다 많은데? 그래도 내가 누나야. 스물여덟. “

”아깝네. 뭐 나이가 중요한가. 난 캐나다 사람이거든. 그래도 한번 정도는 할 수 있지. 누나. 이제 우리 사귀는 거 맞지? 기념으로 오늘은 옐로나이프의 낮을 보러 가자.”


2018년 12월 26일

“네 이야기는 언제 해 줄 거야?”

“이름은 정은우. 나이는 28. 뭐가 더 궁금한데?"

”가족 이야기. 어린 시절. 좋아하는 거. 뭐든지. "

”넌 항상 제일 깊은 곳까지 들어오려고 하는구나. "

”근데 네가 너무 깊어서 노력하는 중이야. 열심히 해볼게.”


2018년 12월 27일

“너는 왜 나였어? 나한테 차에서 먼저 말 걸었잖아.”

”카메라가 좋아 보였어. 저렇게 좋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어. "

”설마 부자라고 생각한 거야? "

”맞아. 근데 아니지?”

Jay의 난감한 표정을 보자마자 은우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그제야 Jay는 은우가 자신을 놀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고 싶은 카메라를 사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돈이 많아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를 읽고 있었잖아. 올란도를 읽는 남자는 꽤 근사했거든. "


2018년 12월 28일

”이렇게 추운데도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사진을 찍어? 카메라는 괜찮아? 방전되지 않았어?”

”핫팩을 붙였지. 보조 배터리도 준비하고. 전화했었지? 핸드폰도 방전이 잘 되거든. "

“촬영하는 동안은 만나지도 못하고 연락도 안되고. 낮에는 자야 하고. 누군가를 계속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었네. “

”처음에만. 다들 오래 기다리지는 못하더라고. 헤어지자는 문자를 나중에야 확인했지. 너는 괜찮겠어? 나 같은 사람?”

“나는 먼저 헤어지자고 말한 적은 없어.”

“왜?”

“사는 게 바빠서. 헤어지자는 말을 못 했어. “

“네가 바쁜 사람이라 좋다.”


2018년 12월 29일

“은우. 옐로나이프는 어땠어?”

“잊을 수 없었지. 네 덕분에 가득 찬 기분이었어. “

”일주일은 짧고, 일주일이 전부였으니까.”

”올란도처럼 하루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어. "

”사는 게 바빠도 잊으면 안 된다. 우리 지금 사귀는 거야. "

”너무 기다리게 하면 잊을 수도 있어.”

”너는 사느라 바쁘니까 그냥 살아. 살고 있으면 내가 갈게. 우린 또 볼 거야. 생각보다 자주. 전화할게. "


2019년 1월 24일, 토론토

“어떻게 한 달 만에 보고도 놀라지를 않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토론토로 온다고 했잖아."

“점처럼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안 보이는 사람처럼? 그런데 평소에 이렇게 입고 다녀? 이렇게 몸에 붙는 짧은 드레스도 입고 화장도 하고 하이힐도 신고? 어떻게 안 보일 수가 있어?”

“오늘 송별 파티가 있었어. 거기선 내가 제일 안 보였을 거야. 이렇게 안 입으면 오히려 잘 보이는 자리였다니까. 그리고 안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예전의 각오야. 지금은 네 눈에 제일 잘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 “

”어떻게 입어도 너만 보였을 거야. "

Jay의 다정한 고백 때문이었을까. 은우 역시 담아두었던 마음을 이야기한다.

“다시 너를 못 보게 될까 봐 두려웠어. 보고 싶었어.”


2019년 2월, 서울

슈트 차림이 잘 어울리고, 진지한 말투와 모범생 같은 행동으로 무장한, 성실하게 돈을 벌고 연애마저도 성실하게 하는 은우의 남자친구들을 보며 지우는 늘 고개를 저었다. 똑같은 사람 둘이 만나면 무슨 재미가 있냐고 놀려도 은우의 남자친구들은 화를 내지도 않고 젠틀하게 웃어주기만 했었다. 재미없게.

“캐나다에서는 어땠어? 설마 여기서랑 똑같이 지냈어? 집 학교 집 학교 그런 거 아니지? 너 사진 보니까 오로라도 보러 갔더라. 사진은 더 없어? 이 사진은 뭐야? 언니야? 누가 찍으면 사람이 이렇게 보여? 어? 이 사람은 누구야? 뭐야. 빨리 말해 봐.”

지우가 은우의 남자 친구 이야기를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들은 적은 처음이다. 은우의 남자 친구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지우가 이런 표정으로 은우의 이야기를 들었던 적은 없었다.

“여행 가서 만난 연하의 남자? 사진을 찍고 밴쿠버에 살아? 오. 너무 로맨틱하긴 한데 쉽지 않겠는데? 그래도 언니 연애 중에 제일 흥미진진하다.”

여행지에서의 짧은 인연에 불과하거나 서로에 대해 잘 몰라 더 빠져버렸을지도 모를 찰나의 감정일 수도 있었다. 서울과 밴쿠버에 살며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같은 서울에 살았던 은우의 젠틀했던 남자친구들이라고 해서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하던 날들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었을까. 하루의 일과를 전하는 전화도 할 시간이 없어 겨우 만난 주말에는 은우가 아닌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몹시 억울해했을 것이다. 내가 뭘 더 얼마나 해야 했냐고.

Jay는 밴쿠버의 저녁거리를 달리며 은우의 아침을 깨워 줬다. Jay가 듣는 음악과 함께 은우가 출근 준비를 하고 굿 나잇 인사를 하고는 서울의 복잡한 거리로 나섰다. 주말에는 같은 영화를 골라 같은 시간에 영화를 보기도 했다. 공간을 공유하지 않았다고 해서, 같은 시간이 아니라고 해서 동시가 아니라 말할 수는 없었다. 둘은 서로의 옆을 지키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언제나 서로의 곁을 지켜주는 존재였다.


2019년 6월

“여름방학에 밴쿠버에서 만나. 내가 갈게. "

“안 되겠는데 이번 관측이 길어질 거라서. 멀리 갈 거야.”

당연히 반겨줄 거라 믿었던 Jay에게 거절을 당한 은우가 당황한다. 말투에서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Jay에게는 샐쭉해진 은우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는 건데? “

”나한테만 먼 곳. 너에게는 가까운 곳으로. 몽골에서 촬영을 할 거야. 촬영이 끝나면 서울로 갈게.”


2019년 7월

수트라고는 입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편한 옷차림, 어색한 한국말 때문인지 어려 보이는 외모를 더욱 어리게 느끼게 만드는 말투, 겉옷을 벗자마자 삐져나온 타투까지. 사진과 영상으로도 놀라웠는데 눈 앞에 나타난 언니의 남자친구를 보고 지우는 한 순간 말을 잃었다.

”언니. 내 생각보다 훨씬.”

지우가 은우를 돌아보며 입모양으로만 말한다. 이상해라고.

“네가 은우 동생? 지우? "

”와. 언니 진짜. 우리 얘기 좀 할까. 이 분 없는 곳에서. 아니다. 여기서 빨리 말해도 못 알아듣는 것 같긴 한데.”

“여기서 해. 나 못 알아들어.”

“진짜 새로운 스타일이네. 언니. "

“이거 칭찬인거지? 반가워. 나는 Jay. 잘 부탁해.”

“뭐야. 한국말 잘하네. 반가워요. 저는 지우에요. "


2019년 8월

Jay가 캐나다로 돌아가자 지우는 은우에게 하고 싶던 말을 쏟아 버린다.

”Jay가 돈을 벌긴 해? 언니. 언니는 다 갖고 살 수 있는 사람이랑 결혼하는 줄 알았는데. 서울에 있는 아파트 살면서 좋은 차도 타고 애도 둘 정도 낳아서 영어유치원 보내면서 살 수 있잖아. "

흥분한 지우와는 달리 은우는 그게 뭐가 대수냐는 표정이다.

”나는 그런 거 관심 없어. 네가 그렇게 살아."

지우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은우가 대응을 하지 않자 지우는 약이 올라 더욱 은우를 몰아세운다.

“내가 되냐. 언니 같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재계약이 될까 조마조마하면서 겨우겨우 돈 버는 나 같은 사람이 되겠어. 언니는 그런 사람들 잘만 만나다가 결혼할 때 되니까 왜 그래? 막 놀고 싶고 그래? 어릴 때 못 놀아서? 내가 놀아보고 자유로운 영혼도 만나보고 그랬는데 별 거 없어. 다 똑같아. 정신 차려. "

큰 소리로 자신을 나무라는 지우의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은우는 오히려 지우가 귀엽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너처럼 살아 보려고. 나 보면 답답하다면서."

지우는 이제 말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은우의 얼굴을 보니 피식 웃음까지 나온다.

”뭐가 그렇게 좋다고 웃냐. 완전 사람이 변했어. "

지우는 이제 Jay와 영상 통화를 할 때에도 일부러 화면 밖으로 비켜서지 않았다.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아끼는 것들까지 함께 보듬어 주게 된다. 그 사람의 웃음이 좋아 웃음을 따라가다 보면 웃음이 멈추는 곳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지우도 언니의 기다란 웃음 끝에는 항상 Jay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2019년 12월 23일

“오빠. 언니가 왜 좋아요?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 먼 데를 또 온 거예요? 서울 전시회는 핑계죠? 아. 전시회 하게 되면 비행기값은 내주겠구나. "

“맞아. 네 말이 다 맞아. 은우가 좋은 이유? 난 은우 다 좋은데. 얼굴, 몸매, 목소리, 성격. 그리고 웃겨.”

“네? 웃기다고요. 이 오빠 우리말 다 잊으셨네. 웃긴 게 뭔지 알아요?”

”나 웃게 해 주는 거 아니야? 은우 보면 웃음이 나오는데. "

지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우야. 은우는 뭘 좋아해? "

“진짜 어려운 질문이에요.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기가 어려운 사람이었거든요. 근데 요새는 좀 알겠어요. 오빠를 좋아해요. 나는 언니가 저렇게 웃을 수 있는지 여태 몰랐어요.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기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하고. 언니도 보통 사람이더라고요.”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한 지우를 놀리고 싶어진 건지 진짜 못 알아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Jay가 지우에게 심각한 얼굴로 부탁한다.

“천천히 말해 줄래?”

“이럴 때만 그러더라. 다 알아 들었잖아요. 우리 언니는 한국말 좀 어눌하게 해서 자꾸 설명하게 하는 스타일 좋아하나 봐요. "

“나? “

이제는 지우도 왜 은우가 Jay를 좋아하는 건지 알아 버렸다. 지우 역시 Jay 옆에서는 아무리 까칠해지려고 해도 실실 웃음이 나오려고 했으니까.


”알아들었으면서 왜 자꾸 물어봐요. 그러니까 우리 언니 외롭게 하지 말아요. 혹시 모를까 봐 말하는데요. 우리 고아예요. 고아 알죠? 엄마, 아빠 없는 사람. 나중에 알고 헤어질지 말지 고민하고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거예요. 절대 불쌍해하라고 말하는 거 아니에요. 나랑 언니 불쌍한 사람은 아니에요."

지우는 Jay가 이런 말로 헤어지자 말할 사람이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니를 더 아껴줄 거라 아니면 동생 앞에서도 마음껏 울어본 적 없는 언니가 혹시 Jay의 앞이라면 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도 미리 말할게. 나도 고아야. 그런 표정으로 볼 필요는 없어. 사람들은 누구나 언젠가는 고아가 되잖아. 너희가 먼저였고, 다음이 나인 거지. 내가 여기서 괜찮다도 해야 할 것 같지? 아니. 너무 힘들었어. 지금도 힘들어. 나는 어른인데도 견디기 힘들 만큼 슬펐어. 하지만 슬픈 사람들이 다 불쌍한 건 아니니까 너도 나도 불쌍한 사람은 아니야.”

Jay가 지우를 보며 웃는다. 지우는 어느새 Jay가 은우의 곁에 오래 머무르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우야. 너나 나나 둘 다 가족이 너무 적은데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지 않아? 슬플 때 불쌍해하지 말고 같이 슬퍼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나랑 가족이 되는 거 한번 생각해 볼래? 은우한테는 아직 비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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