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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밍 Aug 13. 2022

굳이 산을 오를 필요는 없다

다음날 새벽에 우리는 <라스 토레스> 캠핑장을 나섰다. 새벽이라고 했지만 거의 한밤에 가까웠다. 온통 어두컴컴해서 헤드라이트로 겨우 발밑만 간신히 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부슬비가 내렸다. 비를 맞은 산길은 미끄러웠다. 평소보다 더 조심해서 걸으니 체력소모가 심했다.


그래서 여정의 중반쯤에 자리잡고 있는 <칠레노 산장>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비바람이 몰아쳐서 이제 일출을 보는 것도 의미가 없어보였다. 우리는 산장 식탁에 앉아서 쪽잠을 잤다. 얼마간 잠을 자고 나니 아저씨가 밖에 무지개가 떴다고 했다. 어느새 바깥에는 동이 트고 있었다. 부부는 날씨가 개었으니 이제 출발하겠다고 했고 나는 좀더 쉬어야할 것 같아서 우리는 그곳에서 헤어졌다.


칠레노 산장에서 맞이한 아침 무지개


<칠레노 산장>에서 <토레스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길은 가장 가파른 곳이었다. 4일 연속으로 산을 타고 있었고, 이제는 가장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슬슬 육체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쯤 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기계적으로 오른발과 왼발을 움직일 뿐이었다. 마침내 <토레스 전망대>에 도착했지만 아 무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기계적으로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 한장을 위해....(말잇못)


어쨌든, 결국에는 사진만이 남는다는 생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사진을 찍었다. 혼자서 열심히 삼각대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이 너무 힘들어보여서 웃음이 났다. 혼자서 무슨 에베레스트산이라도 오르는 산악인처럼 머리는 산발에다 코끝은 빨갛게 익어있고 완전 엉망인 꼴이었다.


멋진 포즈와 그렇지 못한 표정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내려오는 길도 쉽지 않았다. 내려오는 길에는 바람이 몸을 쓰러뜨릴 정도로 심하게 불었다. 캡 모자를 쓰고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나는 하필이면 또 벙거지 모자를 쓰고 있어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모자가 날아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산을 내려오는 내내 한손으로 모자를 붙들고 가야 했다. 하지만 몇번이고 모자를 계속 놓치기 일수였다. 며칠 간의 산행으로 온몸이 아프고 너무나도 피곤한데, 모자도 계속 바람에 날아가니 짜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너무 힘드니까, 어느 순간부터 미친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쌍욕을 하기 시작했다. 아오 미친, 내가 여기를 왜 와가지고 이 고생을 하는거지, XX, XX, XX, 아악, 미쳤지 미쳤어 내가 왜...! 몇몇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지나갔지만 상관 없었다. 어차피 내 말을 알아듣지도 못할테고. 지리산이었다면 조금 창피했을테지만 여기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곳이니까,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아름다운 풍경도 이제는 더이상 아름답게 보이지가 않고 한시 바삐 도망 치고 싶은 지옥도처럼 보였다. 마지막 몇시간 동안은 그야말로 광기어린 산행이었다. 마침내 토레스 델 파이네를 떠나는 버스에 올라탔을 때는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버스 터미널, 한시 바삐 탈출하고만 싶었다


돌이켜보건대 산에 오르면, 그리하여 내 몸을 고단하게 만들면, 내가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지고, 그 동안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될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이 될때까지 극기훈련 이랄지, 전지훈련이랄지, 온갖 거창한 이름을 한 등산을 다니면서 나도 모르게 은연중 그런 생각을 하고만 것이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그런 생각을 박살내줬다. 아름다운 산은 그냥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굳이 산에 오를 필요까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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