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레스 델 파이네>를 떠나 <엘 칼라파테>에 도착한 것은 크리스마스날이었다. 남미에 도착한 이후로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계속해서 이동해왔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모든 관광지도 문을 닫았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기 엘 칼라파테는 초콜릿이 유명하다고 해서 시내에 나가 카페에서 따뜻한 초콜릿을 시켜 먹었다. 간만에 보내는 한가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어쩌다 지금 이곳에 오게 된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남미에 오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지금의 나 자신이 되었는지 - 솔직히 나는 내가 직장인으로 살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새 어엿한 5년차 직장인이 되어 있다.
나는 숫기도 없고 돈 버는 데는 영 재주가 없는데, 지금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엄청나게 많은 전화를 하고 어떻게 하면 더 매출을 올릴 수 있을지 고민하며 살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적성에 맞는 일인가, 하고 자문하면 반반이다. 어떤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선 적성에 맞는 것 같은데, 숫자는 아직도 약한 것 같다. 그래도 회사 아저씨들이랑 능청스럽게 농담도 주고받고 가끔 화가날 땐 소리높여 싸울 수 있게 된 데에는 나름의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물론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쩌면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막막해서 울고 싶었던 대학시절보다도 더 행복한 것 같기도 했다. 내 인생 그 어느 한 순간에라도,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는데 행복한게 어리둥절하기까지 할 정도로.
아무튼, 여기까지 생각에 이르다 우습지만 이번에는 프린세스 메이커를 떠올렸는데, 새삼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경우에 게임 속의 딸들은 비록 공주가 되지 못했어도 행복해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 아버지 저는 농부가 되었어요! 축하해주세요...) 근데 빈말로 그냥 행복하다고 한게 아니라, 정말로 그때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했던 거구나, 하고 엘 칼라파테의 카페에서 비로소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굳이 반짝반짝한 공주의 삶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있을 곳을 찾게 되어서 행복할 수 있었던 거구나. 게임 속의 딸은 18살에 깨달은 걸 나는 29살에 깨달았다.
얼마 남지 않은 29살을 보내면서, 9살, 19살이 어땠는지 떠올려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39살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지금 이순간도 흐릿해질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9 살, 19살 때의 나보다, 나는 29살의 내가 좋다. 그러니까... 괜찮을 것 같다. 알 수 있다. 지나가는 것을 굳이 붙잡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변해가는 것을 굳이 안타까워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