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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리 Oct 20. 2024

수많은 사람들 속, 여기 진짜 평범한 사람이 있다

이력으로 보나 성장과정으로 보나 이토록 평범할까 싶은 나인데, 그동안의 나는 어땠을까


난 꿈이 없었다. 초, 중, 고를 거쳐온 그 사이에 내게 특별한 재능이 발견되지도, 뭘 좋아하고 잘하는 지도 찾지 못했다. 친구들에게 나중에 뭐 하면서 살고 싶은 지, 남는 꿈을 구걸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배경에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집안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았으며, 이후에도 무언가를 할 생각도 없던 태권도만 아빠가 원해서 8년을 다님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투자를 했다. 공부 관련된 학원도 거의 못 다녀봤고, 피아노 학원도 남들 어렸을 때 한 번씩은 다녀봤다는데 건반 칠 줄도 몰라,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몇 달 엄마가 아빠 몰래 보내줬다

공부를 특출 나게 잘하지 않았지만 예체능적 재능도 없는 나를 실업계에 보내려 하여 갈등

설득 끝에 인문계에 들어갔으나 대입 준비과정에서 과 선택 차이로 심한 갈등


평소 내 성적에 관심도 없고 내가 뭘 관심 있어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대입을 앞두고 무슨 일인지 꿈을 물어본다 '넌 하고 싶은 게 뭐냐고'


그나마 약간의 관심이 있었던 걸 말하긴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생전 그런 게 없는 애가 약간이라도 있다고 말했을 때는 귀담아 들어줄 법도 한데


“그거 해서 뭐 할 건데,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기술 배워라”

이게 과 선택의 조건이었다.


원래도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살았지만, 이때부터 더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대화가 안 되는 집이라 '될 대로 돼라'라는 심정으로 자격증을 필요로 하는 과, 성적이 되든 말든 졸업하면 적당한 기술로 취업이 될 만한 과는 모조리 찾아서 닥치는 대로 다 지원했다.


그중 뜻하지 않게 조리과에 붙게 되며 순탄지 않은 학교생활이 시작됐다


하필 조리과라니..

과 특성상 이미 고등학교 때 모든 자격증을 취득하고 온 사람들도 많았고 요리가 좋아서 택한 사람들, 그리고 뒤늦게 학업에 열정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나이 있는 언니들이 대부분이었다.

난 대학에 들어오면서 칼을 제대로 처음 쥐어봤다. 당연히 적응을 잘했을 리가 만무하다


다다다닥 현란한 칼질 소리 가득한 실습실에서 나는 칼 잡는 것도 버벅, '딱 딱 딱' 빗겨 맞는 칼 소리가 스스로도 애처롭게 들렸었다. 수업시간에는 늘 미완성 마지막 제출은 나였다. (아니, 제출도 못 한날이 허다하다) 버티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대학시절이다.

학기 내내 나의 자신감은 바닥이었다. 실력이 늘지도 않았으며 속도가 붙지도 않았다.


그 사이 운 좋게도 방학 동안에 실습을 나갔던 호텔 선배님들이 잘은 못하지만 열심히 해보려고 한 나를 좋게 봐주셨는지, 주말에 아르바이트로도 써주시고, 졸업 무렵에는 한 회사에 소개해주셔서 겨울방학 시작 전 집안의 뜻대로 기술을 배워 난 취업에 성공했다


주방에 취직하고 난 후는 매일이 전쟁터였다

뭐 이런 애가 왔냐부터 시작해서, 한숨 가득한 시간들. 언제나 그렇듯 학교에서의 실습과 현장은 다르다. 이때쯤 드라마 ‘파스타’가 인기 있었는데, 이거 보고 요리했냐고도 많이 조롱받았다.


내가 이 주방에서 경력을 쌓아 진급하고 이직하고 이런 구체적인 목표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당연히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지만 집에서도 완강히 반대하여 울며 겨자 먹기로 버텼다.


책임감만 가지고 성취감은 전혀 없는 생활을 어느새 6년 가까이했고, 그 사이에 진급도 하고 주방장 문턱에 올랐으니 이 정도 능력에 이런 성과면 꽤나 성공인 걸까 (그 시절에는 어느 정도 일 할 줄 알고, 1인분의 역할을 하며 연차만 쌓이면 어느 정도 위치 까지는 진급이 가능했다)


정말 욕먹기 싫어서 버틴 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는 정신적인 한계와 체력적인 한계로 인해 집과 기나긴 전투로 일을 그만둘 수 있었다

(말이 주 5일이지, 한 달에 주 근로시간을 제외하고 추가근무가 50-80시간씩 발생했다. 쌀 포대, 김치박스, 내 몸만 한 육수통을 번쩍번쩍 들어 나르며 허리가 나갔고, 수많은 칼질로 목과 손목이 나갔으며 열댓 개의 화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 앞에서 피부를 잃었다)


그만두고자 한 가장 큰 물음표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왜?'라는 궁금함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걸 늦게 알았다. 그냥 하라는 대로 하는 나였다.


여기까지가 27살까지의 일이다.

빠른 취업으로 아직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과는 점점 공통사가 줄어 이해관계가 사라졌고 이 모든 시기를 통틀어 대학 친구들, 직장동료들과의 여행, 회식은 꿈도 못 꿨었다. 외박은 절대 안 됐고, 통금이 11시라 회식을 시작하면 정말 밥만 먹고 1차가 중반에 접어들기도 전에 항상 집에 갔었다 (주방특성상 퇴근이 아무리 빨라봤자 10시다)


어느 날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새벽 2-3시에 들어간 날이 있었는데 내가 올 때까지 온 집안 불을 켜 놓고 두 분 모두 식탁에 앉아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학을 뗐다. (여담으로, 대학 친구들하고 1박으로 가는 여행도 학생 시절에는 신입생 공식 OT 한 번, 여름에 학교 MT라고 속이고 간 한 번이 전부. 이후에는 내가 결혼하고 나서야 처음 가봤다. 거짓말할 용기도 없었다)



그만두고 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그것도 내가 나를 잘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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