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를 끌어안고

by 낭만피셔

밤의 정적이 슬그머니 집을 채울 때가 되면 거실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타닥타닥' 재롱을 부리듯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는 그 소리는 고요한 밤의 서막을 알리는 동시에 내게도 깊은 안도감을 선사한다. 요즘 이레는 아빠가 마음에 들었는지 매일 밤 어김없이 안방 문을 열고 들어와 침실의 고요함을 깨뜨린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침대 옆자리를 파고들어 작은 몸을 웅크린 채 자리를 잡는다. 곁에 둔 멍멍이 인형의 안부를 묻고 뽀로로 인형의 하루가 어땠는지 조잘거린다. 오늘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 할머니와의 오후 등. 아빠는 알지 못하는 하루 일과를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놓는다. 아이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밤공기를 가르고 이야기들은 작은 별들처럼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세상의 모든 피로와 근심을 잠시 잊는다. 순수한 목소리가 지닌 치유의 힘.


그러다 졸음의 무게가 작은 눈꺼풀을 누르기 시작하면 아이를 스르륵 나를 등진다.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듯이. 혹은 자기만의 작은 세계 속으로 침잠하려는 듯이. 내가 늘 눕던 바로 그 자리에서 등을 보인 채 웅크린 작은 등을 바라본다. 그 모습을 보는데 문득 과거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떠올랐다. 선명하고도 아련한 목소리.


"오빠는 항상 날 등지고 자더라"


그분의 서운했던 목소리. 귀에 박힌 듯 선명한 그 말은 차가운 바늘처럼 내 심장을 쿡쿡 찔렀다. 나는 그때 아니라고 잠버릇일 뿐이라고 애써 변명했지만 사실 매번 잠들 때면 그분에게서 등을 돌리고 잠에 들었다. 지금껏 무심하게 지나쳤던 나의 오랜 습관이 날 등진 이레의 뒷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원망스러워졌다. 무심코 저질렀던 행동이 이렇게 깊은 후회로 되돌아올 줄이야. 과거 그분은 내 등 뒤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의 등 뒤로 흐르던 차가운 공기는 나를 향한 서운함의 무게만큼이나 차갑지 않았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몸을 다시 돌려 얼굴을 마주 보고 잠들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따뜻한 위로를 전할 수 있다면. 새삼스러운 후회가 가슴 한편을 저며왔다. 잊고 있던 아픔이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후회는 밤의 고요를 깨뜨리는 소음처럼 내 안을 울렸다.


그렇게 씁쓸한 상념 속에서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 아기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를 등졌던 작은 몸이 내 쪽으로 스스르 돌아누웠다. 내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주려는 듯. 내 옆에 기댄 채. "아빠, 아빠" 잠에 취해 뭉개진 발음과 함께 배시시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아이의 온기, 그리고 웃음. 그 표정에서 나는 그분의 얼굴을 보았다. 아이의 눈매, 입꼬리, 잠결에 짓는 표정까지, 너무나 익숙한 그분의 모습이 아이의 얼굴 위에 겹쳐졌다. 내 등을 바라보며 서운해하던 그분의 피가 시간을 건너 아이의 몸속에서 나를 향해 웃어주고 있었다.


서운함과 후회는 눈 녹듯 사라지고 나는 애정과 부채감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잠든 아이의 고른 숨소리를 들었다. 작은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자장가였다. '귀여운 자식' 나의 과거와 현재를 온몸으로 끌어안은 채, 아이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온기 속에서 나는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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