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바람이 분다. 살아가야겠다.
여름이 끝나고 시원한 가을이 오는 것 같지만, 우리는 당장의 살짝 차가워진 바람에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브런치에 원하던 글 목표를 완료하여 응모를 하고 난 후, 이어서 새로 연재해서 글을 쓰려고 하니 다시 숨이 벅차옵니다. 다시는 그 앞전처럼 글을 쓸 수 없을 것만 같아요. 저는 다시금 부담과 피로감, 무력감을 느껴버리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그토록 자유와 독립,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던 저는 단 한순간만에 이제 막 다시 연필을 쥔 어린 지망생처럼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저는 깨달았던 것을 매 순간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제가 그런 입바른 소리(? 혹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글로 적으려고 한다면 저 스스로를 얼마나 담금질해야 하는지. 단순히 말만으로 그치지 않고 저의 행실 혹은 생각마저도 전부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요.
제가 바라는 이상향을 습관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제 말의 무게가 누군가에게 가 닿을 수 있겠지요. 글만 번지르르하게 적어놓고 제 인생이 게으르거나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거나, 남에게 쉽게 피해를 준다면 저의 말은 아무런 신뢰도, 누군가에게 변화의 목소리도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영향 혹은 영감을 준다는 것은 그만큼 무거운 일이에요. 그래서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해야만 하구요. 누구보다 스스로의 기준을 잘 다듬어야 합니다.
최근 열심히 인플루언서이자 작가로서 나아가고 있을 때 남편 친할머니의 부고소식을 듣습니다.
저는 당연히도 저의 일정을 모두 스탑하고 장례를 치르는 기간과 사람에게 저의 모든 것을 집중합니다. 일을 하는 동안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편안했고 저의 친할머니는 아니셨지만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의 기원이자 아버님의 어머니인 할머님을 위해 일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그 장소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두요.
그리고 소원했던 남편의 가족들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할머님의 큰 덕이자 복인 것이지요.
그런데 한편으로 두려웠던 점도 있었습니다. 그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도 제대로 뵙지 못했었다라면... 저는 어떤 기분으로 그 자리를 채울 수 있었을까요. 다행히 결혼 전 고모님의 부름으로 저는 남편과 함께 시골 할머니집을 방문해 치매가 있으신 할머니를 만나 뵙고 옵니다. 그때 그냥 단지 제 가족이 온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의 가족을 매정하게 외면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오기 너무 부끄러웠겠죠.
저에겐 외가, 친가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일찍이 돌아가셨고 심지어는 원가족들도 부서진 빵처럼 다 으스러져 있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조금은 불완전하더라도 모양새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그의 가족들을 뵙는 일에 적극적이게 임합니다.
저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지금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이 생각은 제가 기특하거나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치를 수 있는 용기가 매 순간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꺼내보았습니다. 저의 상황이 어떻다는 것과 별개로 지켜야 하는 사회적 그리고 사람 간의 규칙과 예의가 있습니다. 그것이 한두 번 깨지다 보면 저를 온전히 유지할 수 없고 누군가의 일상도 제가 쉽게 파괴해 버리게 되겠지요.
힘들었지만 제가 그런 순간순간마다 그럼에도 지켜야 할 것들을 적극적이게 혹은 소극적이게라도 지키려 했기 때문에 그 덕분에 지금에 제가 있는 것이겠지요.
저는 당연하지만 3일장을 치르고 다음날 병원검사까지 하고 나니 파김치가 되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가 힘들었습니다. 어제만 해도 하루종일 잠만 자거나 우울한 기분에 빠져있곤 했죠. 제가 회사를 그만두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또 조심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저를 지키는 일을 놓칠 뻔했습니다.
다행히 저녁 운동을 마치고 나서야 저는 정신이 번쩍 들고 다시 저의 일상과 저 스스로를 돌보는데 집중하기로 합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제가 바라는 목표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지 그것이 하루아침에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당연한 진리를 저는 또 조급하게 치르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를 희생하여... 저는 벌써 공모전 혹은 블로그 협상에 난항을 겪었고 네이비 리빙 메인노출의 결과는 마치 한순간의 운뿐이었던 것처럼 그다음 계단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곳에 도사리는 여러 방해물이나 저의 능력부족은 저를 강인하게 해주는 자원이 될 것이지 저를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요.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가야겠다는. 프랑스의 유명한 시인 폴 발레리가 한 문구입니다. 물론 제가 정말 그 시인을 알고 적은 것은 아니구요. 최근 저는 지브리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바람이 분다를 보게 됩니다. 아마 당시에는 제가 굉장히 바빠서 그 영화가 나온 지도 모르고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늦게라도 본 보람이 크게도 너무나도 멋진 작품이더군요.
미야자키 하야오가 늘 말하고자 하는 방향성의 이야기가 그곳에 다시 깔끔하고 정성스럽게 수놓아져 있었어요. 저는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도 떠오르고 최근에 본 오펜하이머도 떠올랐습니다. 반전영화를 이렇게 다정하게 쓰고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아요. 그 감독들 그리고 그 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생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매 순간 불어오는 바람과 떨림 사이에서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는 것. 생은 그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무너지지 않아요. 생은 그저 생으로 봐준다면 고난 또한 그저 삶의 일부일 뿐 모든 것에 경건할 수 있는 것이겠죠. 물론 그것은 힘듦을 참으라는 어리석은 말은 당연히도 아닙니다. (저의 글들을 읽으셨다면 자신을 지키는 일이.. 1순위입니다. 나와 이웃.. 부끄럽게도 마치 예수의 말과 같네요.)
그렇다고 제가 종교인인 것은 아닙니다. 저는 우주를 믿고 저를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종교들은 저에게 가르침이 되어주지만 그렇다고 한 가지만 믿게 된다면 편협한 사고를 하게 될지도 모르고 꼭 항상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조심스럽습니다.
세상에 한 가지 정답이 있다면 정답이 없다는 것이 정답이라고 믿습니다. 그마만큼 인생에 정도는 없다는 뜻이겠지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가도 오늘은 또 이렇게 스르륵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네요. 참 감사합니다. 사실은 새로운 연재글로 좀 더 밝은 주제로 가져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요 근래의 사건들로 다시 초심의 마음을 가져오게 됩니다. 감사하죠. 다시 저를 땅 위로 내려앉게 하고 지지대를 놓아주는 이런 스산한 바람들을 저는 항상 반갑게 맞이할 것입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짐승의 소리를 하고 오는 바람도 전쟁으로 둔갑한 이웃의 시기질투의 바람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내시기 바랍니다.
PS.
바람이 분다에 걸맞는 그림을 찾다가 발견한 작가 한스 에메네거. 그림들이 다 너무 훌륭하고 아름다워서 앞으로도 찾게 될 것 같습니다. 정적이면서 동화적인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