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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Sep 14. 2023

단약을 할 수 있을까

과연 언젠가 있었을, 약 없이 잘 자던 날들

약 먹고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한데 ‘뭣 하러 단약을 하나‘ 생각했다. 지금 정도의 삶에 안주했다. 이렇게라도 매일의 불면과 우울감에서 벗어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실은 그랬다.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으면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여기서 ‘어느 정도’라고 함은, 같은 약을 같은 시간에 먹었음에도 불구 못 자는 날들이 간간이 섞여 있긴 하다. 그래도 아예 안 먹으면 30분~1시간마다 깨곤 하니 그 정도는 양반. 약을 먹으며 특별히 잘 잔 날에는 사람도 만나고, 남들 다 꿈꾸는 일상적인 미래를 같이 꿈꾸는 척도 해 보고, 그날 하루를 최대한 즐기려 애쓰다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약만으로는 소용이 없어지는 순간이 온다. 한동안 처방약이 잘 맞다 싶다가도, 일정 시간이 지나 더 이상 같은 효과를 볼 수 없어지는 것이다. 그럴 때에는 다시 정신과에 가서 새로운 증상을 말하고, 조금은 달라진 조합으로 약을 처방받는다. 약에 내성이 생겨서일 텐데 그보다는 나의 새로운 상황과 심리상태를 탓하며 쉽게 다른 약으로 옮겨갔다.


그렇게 다시 내게 맞는 약을 찾는 과정을 서너 달 거치면 또 적당히 맞는, 다시금 일상생활을 꿈꿀 수 있게 해주는 약을 찾게 된다. 안정됐다 싶을 때 다시 이사를 가야 하는 번거로움의 연속이지만 어쩔 수 없다. 약 없이 잠드는 밤은 막막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단약을 하려는 시도는 많았다. 하지만 약을 먹지 않은 나는 자주 깨는 것을 넘어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며칠을 그리 버티면 쌓인 피로에 푹 잘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누적된 피로는 가위를 불러왔다. 그렇게 약 없이 지낸 기간 나는 신경이 곤두서고 너덜너덜해진 채 ‘이게 사는 건가’만 되뇌이는 상태가 된다. 


결국 나를 위해서, 그리고 주변사람을 위해서 다시 약을 처방받는다. 그러면 조금은 긴 회복기간 끝에 '일상력' 되찾고 그제야 '살 거 같다'라고 느낀다. 


아, 이제야 살 것 같고, 

그냥 뭐 약 까짓 거 먹으며 이대로 평생 살아도 될 것 같고, 

아니 사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이렇게 살아야만 할 것 같고. 


규칙적인 생활만 유지된다면 이 약, 저 약, 도망치며 평생 이리 살지 뭐,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이었다. P언니와 늘 하던 일상적인 이야기 도중,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이야기가 나왔다. 요즘 유독 다큐를 찾아보고 있다는 언니는 내게 두 편의 작품을 말했는데, 그중 하나가 <테이크 유어 필스, 자낙스의 경고>. 자낙스, 내가 매일 밤 먹고 있던 약과 같은 종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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