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단말쓴말] 프롤로그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개체나 요소를 모아서 체계 있는 집단을 이룸. 또는 그 집단.
국어사전에 '조직'을 검색하면 나오는 결과다. 쉽게 말해, 어떤 목적을 위해 모인 집단이 조직이다. 따라서 우리가 매일 아침 출퇴근하는 회사도 조직이지만, 신앙의 모임인 교회도 조직이 될 수 있고, 취미로 모인 동호회나 동아리도 조직이 될 수 있다. 목적과 집단이라는 조건만 충족된다면 말이다.
어느덧 조직에 몸 담은 지 5년이 되었다. 아, 오해는 마시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런 '조직'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위해 집단을 이룬 것, 그러니까 회사 생활을 한 지 5년이 넘었다는 뜻이다. 남들 다하는 회사생활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조직이라는 용어까지 쓰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조직이라는 단어야말로 회사생활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목적을 갖고 이룬 집단'이라는 특징 때문에 조직은 필연적으로 강점과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목적과 절차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만약 조직에 속하지 않은 사람, 이를테면 이익관계가 없는 제삼자나 계약관계가 희미한 프리랜서는 다소 개인적 윤리와 신념에 입각해 선택할 수 있다. 목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목적을, 절차를 중요시한다면 절차를 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조직의 구성원에게는 선택지가 따로 없다. '목적을 위해 모인 집단'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목적'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조직에서의 비극을 만드는 요소다.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드라마 『미생』 시즌1에서는 너무 착하고 순한 박 대리가 나온다. 그는 하청업체에게 쓴소리 한마디 못 하는 사람이라, 상사에게 까이는 게 일상이다. 아마 친구나 가족에게는 더없이 좋은 사람일 텐데, 박 대리가 나오는 장면을 편집한 유튜브 영상에서는 박 대리를 질타하거나 안타까워하는 댓글로 가득하다. '저건 박 대리가 잘못한 거다', '회사가 맞지 않는 사람', '착하긴 한데, 너무 답답하다'. 명실상부 조직의 비극이다. 윤리적으로 착한 사람이 아니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이 조직에서는 '착한 사람'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회사라는 '조직'에 들어가는 사람은 수많은 고통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우리는 자라오면서 알게 모르게 도덕과 윤리 교육을 받았는데, 조직 안에서는 그런 것들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직장 생활을 잘하고 못 한다의 차원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직에 맞게 적응해야 한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표정관리를 연습해야 하고, 능숙하게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일하는 척하거나 일이 잘 되어가는 척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거짓말과 위선, 속임수와 대안적 사실 사이에서 능란하게 줄타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필연적으로 '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인 집단[조직]이니,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걸 따질 틈이 있을까? 나의 감정과 생각을 오롯이 전달하거나 표현할 수 있을까? 하기 싫은 일을 거절할 수 있을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면을 써야 하므로, 개인의 윤리와 신념도 잠시 내려놓게 된다. 그래서 조직에 순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는 사라지고, '조직'만 남게 된다. 오랜 기간 일하고 퇴직하는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월급을 더 이상 받지 못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어쩌면 '나'를 가득 채워버린 '조직'이 내 안에서 사라지는 것 자체일지도 모른다.
조직에 적응하는 것은 이처럼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 1년은 정말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거의 매일 퇴근하면 쓰러지듯 잠들었으며, 주말에는 친구들을 붙잡고 상사와 조직을 욕하기 바빴다. 힘든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는 매일 울면서 잠들었고, 한때는 자살 충동을 심하게 느낀 적도 있었다. 나름 스스로 조직에 잘 적응하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도 이랬거늘, 만약 조직 생활이 맞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나는 과감하게 조직 생활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악몽 같았던 첫 직장을 나오고 두 번째 직장을 다니고 있는 지금, 조직에서 적응하는 동안 배운 것이 적지 않음을 느낀다. 집단의 목표 달성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는 법, 그렇게 희생하는 개인들끼리 최대한 협력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 법, 예의를 갖추는 기술, 직급에 따라 달라지는 배려하는 방법 등. 조직의 단맛쓴맛을 다 보고 나니, 비록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일을 통해 떳떳하게 돈을 버는 사람으로서의 탄생처럼 느껴져 기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직의 단맛과 쓴맛은 다름 아닌 '말'을 통해 맛볼 수 있었다. 때로는 아주 거친 말("너 내가 우습게 보여?", "그렇게 병신같이 살지 마!")을 듣기도 하였고, 때로는 3시간 넘게 일장연설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니 그런 영양가 없는 말들은 모두 기억에서 잊히고, 나의 성장을 이끈 결정적인 말들만 기억 속에 남았다. 솎아내고 솎아낸 결과, 총 15편의 글로 엮을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말은 이보다 더 많지만, (매운맛을 제외한) '조직의 단맛쓴맛'을 느끼기에 적당한 말들만 추려낸 것이다.
이 책은 회사라는 조직에 들어가길 앞두고 있는 사람이나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또는 반대로 신입사원이 조직에 잘 적응하길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 나를 괴롭혔던 수많은 '매운 말'들은 모두 빼고, 조직 적응에만 필요한 단말과 쓴 말들만 추려내고 이를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쁘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말이지만, 살리고 성장시키는 것도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조직에서 살아남고 성장할 수 있었던 단말과 쓴 말의 맛을 여러분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